국립중앙박물관회 최우수 논문으로 본 ‘채용신의 이덕응 초상’
민길홍 연구관, 12년만에 ‘천마상’
“고종에 대한 충심 시각적 표현
산수 배경으로 초상화 문법 깨… 사진기술 도입 시기, 새 양식 개척”
조선 태조와 고종 등의 어진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은 1916년 4월 유학자 이덕응(1866∼1949)의 초상화를 그렸다. 전북 유형문화유산인 이 그림이 그려진 건 이덕응이 51세 때. 이덕응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자 독립운동가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고종을 향해 망배(望拜·조상, 부모 등을 그리워하며 올리는 절) 의식을 치르고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조국에 충절을 바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엔 의아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실제 이덕응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에 고관의 전유물인 조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1895년 복제 개혁을 거치면서 금관조복은 공식적으로 폐지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일반적인 초상화가 실내를 배경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야외 풍경 속에 놓여 있다. 이 유학자는 어쩌다 뜬금없는 복장과 장소로 초상화에 기록된 것일까.
12일 ‘제15회 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에서 최우수상 격인 천마상으로 선정된 논문 ‘밖으로 나온 초상: 1916년 이덕응 초상에서 금관조복과 산수의 의미’는 바로 이런 의문점들을 분석한다. 적격한 후보가 없으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천마상이 수상자를 배출한 건 2014년 이후 12년 만이다. 심사 과정에서 “초상화 연구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논문에 따르면 이덕응 초상은 단순한 인물 기록화가 아닌,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을 의도한 전략적 도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금관조복은 국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상징물로 여겨졌다. 비록 이덕응은 관직을 지내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조국과 고종황제를 향한 충심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자기 정체성과 서사를 강화”했다는 분석이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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