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없는 선비에 금관조복… ‘빼앗긴 나라’ 충절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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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회 최우수 논문으로 본 ‘채용신의 이덕응 초상’
민길홍 연구관, 12년만에 ‘천마상’
“고종에 대한 충심 시각적 표현
산수 배경으로 초상화 문법 깨… 사진기술 도입 시기, 새 양식 개척”

조선 말기 대표적인 초상화가 채용신이 1916년에 그린 ‘이덕응 초상’(전북 유형문화유산). 실제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유학자 이덕응이 고위 관료의 예복을 입고 있는 점, 초상화로는 이례적인 산수 배경이 그려진 점 등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 출처 민길홍 저 ‘밖으로 나온 초상’

조선 말기 대표적인 초상화가 채용신이 1916년에 그린 ‘이덕응 초상’(전북 유형문화유산). 실제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유학자 이덕응이 고위 관료의 예복을 입고 있는 점, 초상화로는 이례적인 산수 배경이 그려진 점 등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 출처 민길홍 저 ‘밖으로 나온 초상’
푸르게 곧추선 소나무 한 그루 곁에 금관을 쓴 남자가 서 있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가 설날이나 경축일, 종묘사직에 제사 지낼 때 입던 붉은 조복(朝服)을 입은 채다. 양손에 임금을 만날 때 드는 홀(笏)을 쥐고서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이 강직하다. 주변으로는 화사한 봄꽃이 산길 곳곳에 작게 장식돼 있다.

조선 태조와 고종 등의 어진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은 1916년 4월 유학자 이덕응(1866∼1949)의 초상화를 그렸다. 전북 유형문화유산인 이 그림이 그려진 건 이덕응이 51세 때. 이덕응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자 독립운동가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고종을 향해 망배(望拜·조상, 부모 등을 그리워하며 올리는 절) 의식을 치르고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조국에 충절을 바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엔 의아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실제 이덕응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에 고관의 전유물인 조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1895년 복제 개혁을 거치면서 금관조복은 공식적으로 폐지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일반적인 초상화가 실내를 배경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야외 풍경 속에 놓여 있다. 이 유학자는 어쩌다 뜬금없는 복장과 장소로 초상화에 기록된 것일까.

12일 ‘제15회 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에서 최우수상 격인 천마상으로 선정된 논문 ‘밖으로 나온 초상: 1916년 이덕응 초상에서 금관조복과 산수의 의미’는 바로 이런 의문점들을 분석한다. 적격한 후보가 없으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천마상이 수상자를 배출한 건 2014년 이후 12년 만이다. 심사 과정에서 “초상화 연구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논문에 따르면 이덕응 초상은 단순한 인물 기록화가 아닌,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을 의도한 전략적 도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금관조복은 국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상징물로 여겨졌다. 비록 이덕응은 관직을 지내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조국과 고종황제를 향한 충심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자기 정체성과 서사를 강화”했다는 분석이다.


논문을 쓴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사진)은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이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덕응은 전북 진안 화양산에 황단(皇壇)을 차려 고종에게 의식을 거행하는 인물로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초상화 속 산수는 기록상 확인되는 옛 황단 모습과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채용신은 여러 면에서 기존 초상화 양식을 깨면서 새로운 양식을 개척했다. 조선의 초상화는 인물 외형 기록에 집중하는 탓에 보통 배경은 텅 빈 실내가 대부분이었다. 바닥에 화문석(花紋席)을 까는 정도였다. 반면 채용신은 야외를 배경으로 택했다. 주인공이 지닌 물건도 이덕응 초상을 기점으로 기존 흉배나 허리띠에서 안경, 홀, 부채 등으로 다양해진다. 국립전주박물관 학술총서 ‘석지 채용신 초상화’에 따르면 당대 채용신은 초상화 주문자가 직접 옷과 소품, 자세를 고르도록 선택지를 제시했다고 한다.19세기 이후 초상화는 정세 혼란, 사진 도입 등 영향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이처럼 서사화된 초상화는 당대에 초상화 수요가 시들해진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점했을 것으로 보인다. 민 연구관은 “인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사진 기술이 도입된 시기에 채용신은 사진기가 담아낼 수 없는 영역을 활용해 초상화를 특화하고 상업적으로도 전략화했다”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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