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카메라를 꺼내 든다. 기억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어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되뇌며 언젠가 꺼내 볼 날을 기약하곤 한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기억처럼, 사진도 서서히 흐려진다면? 그런 사진도 여전히 사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백정기 작가의 작품은 이 같은 의문을 동반한다. 작가는 자연 풍경을 촬영한 후 그 장소에서 단풍잎이나 꽃을 채취한다. 이렇게 주워 모은 식물로 잉크를 만들어 사진을 인화한다. 특별한 잉크로 출력한 사진은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면서 점점 색이 바래고 흐려지는데, 그는 이 과정을 늦추기 위해 특수 제작한 장치에 작품을 넣어 전시한다.
그의 개인전 ‘is of’가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들은 복잡한 회로 장치와 실린더가 부착돼 있어 일반적인 사진과는 다른 낯선 인상이다. 작가는 사진 표면을 에폭시 레진으로 덮은 뒤 장치 안에 넣어 산소와의 접촉을 막는다. 그가 직접 만든 이 체임버는 산소를 비활성 기체인 질소로 치환해 색소와의 화학반응을 막아 사진 속 색을 의도적으로 가두는 역할을 한다.
전시장에 직접 나와 설명을 보탠 작가는 “이 체임버에는 사진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인본주의적 기술력이 담겨 있다”며 “제 작품에는 변화하려는 자연과 붙잡아 두려 하는 인간의 욕망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말했다. 작가 의도에 따라 벽이 아닌 곳에 전시한 작품도 있다. 그는 “초창기 풍경 사진, 특히 19세기 미국 서부를 촬영한 사진은 그 지역을 개척하고 정복하려는 인간 욕망이 내재돼 있다”며 “여전히 우리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 욕망을 환기하기 위해 관람객이 작품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이 특별한 시리즈의 탄생은 2011년 미국 코네티컷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잘 알려진 코네티컷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던 그는 특별한 사진을 위한 특이한 발상을 떠올린다. 비싼 기성 잉크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데이지꽃이나 풀, 비트로 잉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색이 흐려지고 사진은 사라지지만 바로 그 ‘사라짐’이야말로 곧 그가 말하고자 한 작품의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is of’ 시리즈는 이후 점진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특히 올해 선보이는 작품은 이전 작업과 비교되는 세 가지 특징이 포착된다. ‘인물의 부재’와 ‘그림자의 등장’, 그리고 ‘형식의 확장’이다. 기존에 촬영한 사진에는 종종 사람이 등장했다. 그러나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번 작업에는 인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초기 시선이 점차 자연과의 일체화를 추구하며 일어난 변화다. 전시는 오는 8월 17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