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 모는 짐꾼도, 여름 납량객도… 반세기 ‘경성의 명소’ 한강인도교[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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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용산-노량진 인도교 준공… 교통량 늘며 두 차례 대대적 증축 1936년 전차노선 노량진까지 연장… 납량객 2만 여명 몰려 ‘랜드마크’ 생활난 속 조선인 투신 잇따르기도… 제2한강교 준공 전까지 경성 관문 신용산에서 노량진까지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인도교인 한강인도교(한강대교 전신). 1917년 준공됐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홈페이지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한강 도보로 이은 ‘경성 대동맥’1930년대 경성의 행정구역을 확장해 이른바 ‘대경성’을 실현하자는 구상이 힘을 얻었다. 1934년 매일신보는 ‘자라나는 명일의 경성 대도시계획과 그 이상’이라는 연재 기사를 통해 구역 확장 시 경성에 편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살폈다. 그중 한강 남쪽 시흥군 일대를 스케치한 기사를 보면 “만약 오늘까지 한강에 인도교가 가설되지 아니했다고 하면 이곳 주민의 생활은 산간에 부대끼거나 들에 가 풀 베는 것을 아직 면치 못했을 것”이고, “경성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지 못했을 것은 명백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한강인도교는 이곳 주민에 대해서는 크나큰 숨통이오 광명선이라 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이곳 주민은 한강인도교를 왕래할 때마다 쇠잔하든 전일의 시흥을 돌이켜 생각하고 번창해가는 오늘을 비교하여 한강인도교에게 감사를 드리는 생각이 가득하다”고 했다.(매일신보, 1934년 4월 5일)한강인도교는 현재 신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개통하면서 기차는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철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강을 건너려면 여전히 노량진이나 용산, 마포의 나루에서 배를 이용해야 했다. 철교 완공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인도교 부설도 구상했지만 실현하지 못했다. 인도교 건설은 결국 일제의 손에 넘어갔다. 건설 초기 한강인도교의 모습으로, 다리 위를 행인들과 소가 함께 지나고 있다. 왼쪽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홈페이지 강제병합 이후 총독부는 전국의 간선도로망을 구축하기 위한 제1기 치도(治道)사업 계획을 수립했다. 주요 과제 중 하나가 한강인도교 건설이었다. 총공사비 70만 원이 투입된 한강인도교는 1916년 봄에 착공해 이듬해 9월 준공됐다. 가운데 차도와 양쪽 보도를 구분한 최신식 다리로 “한강철교와 함께 경성의 대동맥이 되어 경성, 인천 및 경성 이남 각 지방 사이에 거마와 도보의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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