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 폭력에 시달리다가 남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중형을 받은 40대 여성 피고인이 자신의 실수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구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자 판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기소된 A(43)씨는 지난 4월 9일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자 변호인을 통해 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그는 항소심 내내 “끔찍한 교제 폭력을 겪다가 남자친구에게서 달아나려고 집에 불을 질렀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기에 중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변호인 역시 접견 과정에서 A씨의 굳건한 상고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최종심 변론을 준비했다.
하지만 변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고인이 상고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얼마 전까지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했던 A씨가 돌연 마음을 바꾼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당초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A씨는 항소심 이후 시설이 더 나은 군산교도소로 이감됐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이 건넨 종이를 별다른 생각 없이 작성했는데 이 서류는 바로 최종심의 판단을 포기한다는 ‘상고취하서’였다.
이한선 변호사는 “당시 교도관은 다른 미결 수용자들처럼 A씨 또한 (이감 과정에서) 상고취하서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 서류를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며 “A씨는 이 서류가 교도소 이감 과정에서 당연히 작성해야 할 서류라고 착각해 상고취하서를 써서 교도관에게 건넸다. 만약 피고인이 상고 취하의 법적 의미를 알았다면 이 서류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변호인은 교제 폭력 이후 여러 정신질환을 앓는 A씨가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착오로 낸 상고취하서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며 ‘상고 절차 속행’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지난달 8일 이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주장처럼 교도관이 피고인에게 상고취하서를 작성하도록 권유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며 “또한 피고인이 상고취하서를 제출할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었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이 변호사는 이 결정에 불복해 재항고했다.
A씨도 교도소에서 한 장의 편지를 보내 마지막 판단을 받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존경하는 판사님께’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저는 사건 이후 모든 인지능력이 정지돼 조금 전 했던 행동과 말도 기억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작성했던 상고취하서는 그게 무엇인지, 왜 쓰는 건지도 모르고 작성했습니다. 상고를 취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판사님 저에게 다시 한번 법의 심판을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쓰였다.
A씨는 지난해 5월 11일 군산시 한 주택에 불을 질러 술에 취해 잠든 남자친구 B씨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숨진 B씨는 수년 동안 A씨를 주먹과 발로 때리고 흉기와 담뱃불로 위협하는 등 교제 폭력을 일삼아 실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시민단체는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열고 장기간 교제 폭력에 시달린 A씨의 범행을 ‘정당방위’로 봐야 한다며 재판부에 선처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