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어떻게 감정이 되고, 감정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파리 몽마르트르, 한 예술가의 실험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을 통해 인간 소통의 본질을 탐구한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아베스(Abbesses) 광장의 제앙 릭튀스(Jehan Rictus) 정원에는 세계 250개 언어로 쓰인 311개의 ‘사랑해’가 새겨진 특별한 벽이 있다. 2000년에 세워진 설치작품 '사랑해 벽(Le Mur des Je t'aime)'은 40제곱미터 규모의 이 612개의 에나멜 처리된 화산석 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어, 영어, 아랍어, 스와힐리어, 이누이트어, 한국어까지 각각의 문자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 한 개인의 감정과 문화적 맥락을 담은 작은 우주와 같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문자들은 마치 인류 공통의 감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해 놓은 감정의 사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특별한 벽 뒤에는, 사랑의 언어를 모으고 기록하는 한 예술가의 오랜 집념이 있다. 프레데릭 바롱(Frédéric Baron)은 스스로를 '사랑해' 수집가라고 칭한다. 196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가이자 작가, 음악가, 사진가로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감정을 채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천착해 왔다. "철자 하나쯤 틀렸다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진정으로 중시하는 것은, 문장의 정확함이 아니라 마음의 문법입니다." 바롱의 이 말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을 압축한다. 언어학적 정확성보다 감정의 진정성을, 완벽한 번역보다 진심 어린 표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롱 작가의 이 말은 그의 프로젝트가 단순한 언어 수집을 넘어선 철학적 탐구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바롱과의 대화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감정을 탐색하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해’라는 짧은 문장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와 철학을 만날 수 있다.
▷아직 작가님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님의 예술 여정을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매우 젊을 때부터 피아니스트로 시작했습니다. 18세부터 30세까지 주로 몽마르트르에서 바, 레스토랑, 호텔에서 연주했습니다. 또한 역시 음악가인 아버지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항상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시와 단편소설을 쓰고, 사진과 콜라주에 대한 열정을 키워왔습니다.
제 작품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비밀스럽게, 거의 은밀하게 남아있습니다. 한 친구는 저를 ‘단일 작품의 예술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꽤 정확한 표현입니다. 비록 언젠가 제 노래들이 연주되고, 제 음악이 영화를 배경으로 하며, 또 제가 아이와 어른을 위해 쓴 이야기들—자비로 단 한 권씩 만든 스무 편 남짓의 원고들이—대중에게 다가갈 날을 꿈꾸고 있지만요. 제 작업실에는 그때를 기다리는 대형 입체 콜라주들도 잠들어 있습니다."
▷작가님을 오늘의 예술가로 만든 중요한 순간이나 전환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1990년대 초 세계 일주에 대한 열망을 느꼈던 순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마치 부름과 같았습니다: 나라마다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을 알아가며, 그들의 모국어로 ‘사랑해’를 써달라고 요청하는 것. 저는 이 프로젝트를 ‘Je t’aime en capitales(수도 속의 사랑해/대문자로 쓴 사랑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는 각국의 수도와 대문자 표기 사이의 언어유희였습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모든 배경의 사람들과 사랑에 대해 대화하고 싶다는 이 열망이 제 궤적을 형성했습니다. 몇 년 후, 아녜스와의 결혼, 그리고 클레망과 폴린의 탄생도 마찬가지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예술가의 길을 더욱 엄격하고 진지하게 접근할 동기를 주었습니다."
▷1992년 처음 거리에서 '사랑해'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계기나 순간이 있었나요?
"저는 이러한 ‘사랑해’들을 수집하기 위해 먼 세계를 여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이미 제 주변에,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가 살던 생드니와 특히 파리에는 지구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은 멀리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문 앞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웃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지하철 여행객들, 상점의 상인들, 식당 주인들… 단지 눈을 뜨고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다가가기만 하면, 전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큰 동기와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랑해'를 받았을 때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아마 완전히 처음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였는데, 제가 한 13살쯤 되었을 때였어요. 핸드볼 경기장 구석에 앉아 보고 있는데, 한 소녀가 제 옆에 돌멩이를 놓았습니다. 그 돌 위에는 ‘사랑해(Je t’aime)’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왜 하필 '사랑해'라는 단어였을까요? 다른 감정이나 표현도 고려하셨나요?
"‘사랑해’는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이 표현은 노래, 영화, 책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말입니다. 배우자 간, 부모와 자녀 간, 친구 간 모든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사실 다른 표현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의 정확성보다 감정의 진정성을 중시한다고 하셨는데, 이런 관점을 갖게 된 배경은?
"정확히 그렇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제스처, 감정, 정서입니다. 이것들이 형식적 완벽함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또한 인간에게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수많은 검증과 재검토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벽’의 글귀에는 여전히 실수나 작은 흠이 남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이 작품이 과학적 작업으로 기획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진지하고 엄격하게 제작되었지만, 무엇보다 시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솔직히, 누군가의 ‘사랑해’가 제대로 재현되지 않아 어떤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어 화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벽 상단에 있던 한국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중 ‘나는’이 거꾸로 배치되어 잘못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실수는 지금 수정되었습니다."
▷33년간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랑해'를 부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엄청나게 많은 추억들, 강렬하고 소중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영원히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어느 날 저는 몽마르트르 기슭의 당구장도 겸하는 브라스리에 있었습니다. 카운터에 서서 헝가리어로 ‘사랑해’를 막 써준 헝가리 화가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옆에 레미와 베아트리스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둘 중 누가 먼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한 말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워서 저는 그 ‘신비로운 사랑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저에게 자신들만의 비밀 언어를 만들어, 서로 사랑의 말을 주고받을 어휘까지 갖추었다고 밝혔습니다. 아이카(Aïka)라고 불리는 이 언어에서 ‘사랑해’는 ‘미나나이(Minanaï)’라고 합니다. 그날 레미와 베아는 제가 내민 흰 종이에 미나나이를 써주었습니다.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아이카’의 버전이 오늘날 사랑해 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참 강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만남, 감정, 나눔의 순간, 미소, 서로의 친밀감까지 말이죠."
▷거절당한 경험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매우 드문 거절들은 대개 아이디어 자체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상황이나 순간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쁘거나, 걱정이 있거나, 단순히 저에게 시간을 내줄 여유가 없는 사람들처럼요. 전반적으로 사람들은 제 접근을 호기심과 선의로 받아들였고, 대부분은 저와 다소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언어별로 '사랑해'를 쓰는 방식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차이가 있었나요?
"글씨 제스처에서 차이를 보았습니다. 저는 ‘사랑해’를 ‘사랑의 색깔’로 써달라고 요청했고, 색연필 팔레트를 제공했습니다. ‘사랑해’의 색깔 자체가 이미 첫 번째 다양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아직 예술 작품으로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다음은 다채로운 심리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게 페이지 한 구석에 숨기듯 써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자신 있고 크게 ‘사랑해’를 썼습니다. 형태도, 크기도, 강도도, 색깔도 모두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반응 또한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이고 주저 없이 글을 쓰고, 제가 카세트 녹음기로 그들의 ‘사랑해’를 기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참여하고 싶지만 수줍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아시아, 특히 한국, 중국, 일본 출신 사람들과 자주 느꼈습니다. 이곳에서는 감정 표현이 일정한 절제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3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로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아 출신 많은 분들께서 ‘사랑해’를 쓰는 데 있어 더 신중하고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92년과 지금,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를 느끼시나요?
"아니요,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진정한 변화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커플뿐만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사랑의 감정과 사랑을 말하는 방식은 영속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해 벽’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해’를 하나로 모아 보편적인 정신으로 담는 것, 부모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말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저는 큰 변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주로 느끼는 변화는 제가 사랑하는 방식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노력합니다. 사랑의 고백은 아름답고 강렬하지만, 행동과 구체적 증거가 함께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살아납니다. 그 행동들이 말의 의미를 연장하고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디지털 시대, SNS 시대를 겪으면서 손 글씨 '사랑해'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해 벽’은 아직 손으로 글씨를 많이 쓰던 세상을 이야기하며 바로 그것이 이 작품에 특별한 힘을 줍니다. 오늘날에는 손 글씨가 훨씬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벽은 사랑과 글쓰기, 알파벳, 그리고 글자를 손으로 쓰는 행위 자체를 기념합니다. 2000년에 벽이 탄생했을 때에도 이미 손 글씨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종이에 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많은 소통은 다른 방식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편지 문화 전체가 희미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엽서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뒤에 몇 줄의 손 글씨가 더해진 것이었지요. 오늘날에는 이런 행위가 훨씬 드문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 벽의 손으로 쓴 ‘사랑해’ 한 마디 한 마디는 비록 기름이 칠해지고 다시 쓰였지만 강렬하고 진정성 있는 가치를 갖습니다."
▷클레르 키토(Claire Kito)와 어떻게 해서 예술적 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나요? (*이 작품은 프레데릭 바롱과 클레르 키토가 함께 완성했다.)
"1997년 봄, 공통 지인을 통해 클레르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글씨들의 최종 조립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그녀에게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전문성과 캘리그래피에 대한 열정이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확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클레르는 ‘사랑해’ 글귀와 제가 제안한 예술적 프로젝트의 독창성에 진정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그녀의 글씨와 서예에 대한 그녀의 깊은 관심은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점차 우리 사이에는 강한 인간적 유대, 감성적 공감, 그리고 진정한 예술적 협력이 싹텄습니다. 우리는 함께 다양한 장소에서 설치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클레르는 자연스럽게 ‘사랑해 벽’의 공동 창작자가 되었습니다. 완성될 ‘사랑해 벽’에 대한 공동의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는 오늘날 이 벽의 작가이자 전달자, 수호자가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이미지를 디지털화하고 작업할 컴퓨터가 아직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손으로, 가위, 풀, 복사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의 경우 첫 번째 모형을 만들 때, 글귀를 확대하고 축소하고 잘라서 차례로 붙이는 방식으로 모았습니다. 클레르가 최종 조립을 맡았을 때, 그녀는 작업실 바닥에 모든 페이지를 주위에 펼쳐놓았습니다. 목표는 ‘사랑해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접근법은 작품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며 겉보기에 흩어져 있는 글귀들을 하나의 전체적 서체, 즉 유연하고 시적인 구성으로 변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하트 모양을 오려서 벽에서 보이는 붉은 파편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작품이 모으고자 하는 인류의 ‘부서진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글씨가 개성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시적 작품 속 자리를 찾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과 인내, 조화의 작업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보편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요."
▷만약 클레르 키토를 만나지 않았다면, ‘사랑해 벽’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요?
"‘사랑해 벽’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머릿속에 매우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오로지 글귀로 이루어진 그래픽 시의 형태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색상의 선택이나 각 ‘사랑해’의 위치는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작품의 정신은 이미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조합에는 클레르의 예술적 손길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진정으로 우리의 공동 창작물이 되었습니다.
키토와 저는 서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경청했습니다. 에나멜 판의 파란색은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는데, 파리의 거리 표지판과 제가 파리에서 경험한 세계 여행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흰색은 글귀가 가장 잘 읽히는 색이었고, 빨강은 마음을 상징했습니다. 사랑해 벽은 제 초기 비전과 키토의 예술적 감성이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그녀는 ‘사랑해’를 재료로 활용하며 서예가이자 화가로서의 모든 시선을 담았습니다. 그녀 없이도 벽은 아마도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화산석과 에나멜이라는 재료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에나멜 용암판은 여러 이유로 선택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튼튼하고 견고하며,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에나멜 용암판은 산속 안내에도 사용되며, 내구성과 지속성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용암은 곧 화산이니까요. 저는 자크 브렐(Jacques Brel)의 노래 『Ne me quitte pas(날 떠나지마)』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던 옛 화산에서 다시 불이 솟구치는 것을 종종 보았다.’ (« On a vu souvent rejaillir le feu de l’ancien volcan qu’on croyait trop vieux ») 이 이미지, 즉 꺼진 줄 알았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용암을 선택하는 것은 작품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실용적인 결정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잠들어 있던 사랑도 화산의 용암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몽마르트라는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몽마르트로 결정되기 전에는 여러 후보지가 검토되었습니다. 여러 탐색을 거치면서 점차 장소가 구체화되었습니다. 몽마르트가 이미 저에게 특별한 울림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18세부터 피아니스트로 일했던 구역이었고, 또한 제 젊은 시절 큰 사랑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La clé du soleil(태양의 열쇠)』라는 노래를 쓰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가사 속에는 벌써 아베스 거리(rue des Abbesses)가 등장했습니다. ‘사랑해 벽’의 구상이 있기 전부터 인데도요. 돌이켜보면, 이 장소가 예술적·정서적으로 제 삶 속에 젊은 시절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훗날 탄생할 작품을 미리 예감하게 한 셈이지요.
어느 날 클레르와 산책하다가 우리는 아베스 광장, 제앙 릭튀스 정원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고요한 공간 속, 정원 옆 건물 벽면에 덩그러니 드러난 빈 벽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바로 여기가 작품을 담아낼 보석상자, 요람이 될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국 몽마르트르는 처음부터 신중히 계획된 선택이라기보다는, 여러 기억과 작은 계기들 그리고 우연처럼 다가온 행운이 모여 자연스레 이끌어낸 결과였습니다."
▷당신의 벽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랑을 기념합니다. 이런 접근을 처음부터 의도하셨나요?
"네, 처음부터 작품에 지속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파리 거리에서의 여정,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사랑해’의 수집으로 시작된 이 예술적 모험 전체에 붙여진 이름인 ‘사랑해들’ 자체가 이미 그런 생각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예술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우리의 삶을 넘어서는, 무한하고 보편적인 사랑의 개념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후에도 남아 있을 작품들 말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의식적인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노래와 시와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들이 시간을 건너 살아남기를 바라게 마련이지요. ‘사랑해 벽’ 역시 같은 열망에서 탄생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눈에 보이고 오래도록 남겨, 영원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5년간 벽을 지켜보면서 예상치 못한 변화나 발견이 있었나요?
"25년이 흐른 지금, 무엇보다 먼저 세월의 흔적이 있습니다. 비바람은 벽의 이음새를 손상시켰고, 벽을 복원해야 했습니다. 공원 자체도 변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방문객들의 유입으로 인해 순동선을 새롭게 설계하고, 정원의 구성을 다시 정비해야 했는데 최근에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재료는 살아 숨 쉰다는 말처럼 작품 주변에는 거리 예술가들의 개입도 있었습니다. 벽의 옆이나 위에 새로운 ‘사랑해’를 덧붙여지고 다양한 창작물들이 설치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이라면… 기대하긴 했지만, 매년 수백만 명이 제앙 릭튀스 정원을 찾게 된 사실 자체가 하나의 놀라움이었습니다. 이 열기가 제 상상을 훌쩍 넘어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작품에 감동하고, 춤과 음악, 영화와 드라마, TV 프로그램, 인형극, 바디 페인팅, 사진, 시, 연극, 패션쇼, 거리 예술, 다양한 퍼포먼스로 이어지는 것을 보는 건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는 입맞춤과 포옹, 미소와 끌어안음이 있습니다. ‘사랑해 벽’은 살아 있는 작품이며, 삶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입니다."
▷300개 언어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랑해'가 있나요?
"특히 저를 여행으로 이끄는 글자들에 특별한 매력을 느낍니다. 아랍어, 키릴 문자, 한자, 일본의 한자와 가나, 한글, 티베트 문자… 심지어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의 설형문자 같은 가장 오래된 문자들까지도요. 이런 문자들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들이 지닌 역사로 저를 사로잡습니다. 아마 유럽인인 저에게 일종의 이국적인 매혹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민족을 담고 있는 다양한 글쓰기의 몸짓들, 그 형태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를 다양성 속에서 이어주는 그 무언가가 좋습니다.
물론 라틴 알파벳도 사랑합니다. 특히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프랑스어의 ‘Je t’aime’를 좋아합니다. 제 형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작품 초기에 몇몇 ‘사랑해’를 함께 수집했던 형의 흔적이 있어서, 제 마음속에서 프랑스어의 ‘사랑해’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같은 '사랑해'라도 문화별로 다른 뉘앙스를 발견하셨나요?
"네, 저는 문화적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또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한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서 만난 여성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그녀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반면, 그녀 자신의 문화에서는 이런 말들이 거의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사랑해’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에게 접시의 가장 좋은 음식을 건네거나, 남편이 좋아하는 옷을 선택해서 입는 것으로요.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고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던 겁니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사랑한다는 표현 자체에 상대와 화자의 관계, 나이, 존중의 정도 같은 것들이 반영된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따라 말의 뉘앙스와 의미가 달라지는 점이 무척 흥미로운 섬세함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느꼈던 아시아 문화권의 섬세함과 수줍음이 있는데, 예를 들어 부모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꽤 드문 일입니다. 어느 중국계 캄보디아 여성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버지가 문병을 오자 "사랑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황하며, 정말 많이 아파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그 말을 전했을 때, 아버지는 더 큰 난처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에게 사랑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말을 내뱉는 행위 자체가 해방감이자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사랑이 보편적이면서도, 그것을 말로 혹은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어의 다양성과 감정의 보편성,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셨나요?
"사실 그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사랑,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체험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문화, 행위, 언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사랑은 저마다의 모습과 색, 몸짓과 문자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를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은, 이러한 차이를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아주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삶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무한한 표현의 다양성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를 이어주는 본질적인 가까움을 마주할 때 저는 눈물이 날 만큼 벅찬 감정을 느낍니다."
▷2025년 ‘사랑해 벽’ 탄생 25주년을 맞는 소감은?
"우선,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입니다. 시간은 절대적인 수수께끼입니다. 오늘날 저는 시간의 짧음에서 오는 아찔함과, 그 속에 쌓인 수많은 경험에서 오는 무게를 동시에 느낍니다. 물론 긍정적인 감정이 가장 크지만, 동시에 긴박함의 감각도 느낍니다. 창작하고, 나누고, 전 세계, 특히 한국에서의 협업을 해야 한다는 긴박함입니다. 아마도 다양한 예술가, 장인, 기업, 여러 문화와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할 필요성이 성숙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꿈은 최소한 대륙마다 하나의 ‘사랑해 벽’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유럽에는 하나가 있고, 중국 쑤저우에는 동일한 복제품이 있습니다. 북미와 남미에도 하나씩, 미국과 브라질 정도면 좋겠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도 세우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동에도 세우고 싶습니다. 60세가 된 지금,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10년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너무 많이 복제하면 그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작품은 그 희소성을 유지해야만 시적 힘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 벽’ 25주년은 제게 실험과 협업, 성찰의 시간일 뿐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25년 전 벽을 만들 때 상상했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랑해 벽’은 처음에는 상상 속, 아직 잠재적이고 거의 꿈같은 공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점차 형태를 갖추면서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매일 수천 명이 찾는 살아 있는 공공 공간이 되었습니다. 직감과 꿈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서서히 변모했습니다. 처음에는 클레르와 함께 나누었고, 이후 모두에게 열렸습니다. 오늘날 이 벽은 지나가는 연인들, 가족들, 아이들의 것입니다. 또한 몽마르트르, 파리, 전 세계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아마 이 점일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사랑해 벽’은 단순히 꿈이나 돌 속에 갇힌 시가 아닙니다. 실제로 형태를 갖추었고,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2026년 한불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과의 협업을 계획하고 계시는데, 한국어 '사랑해' 표현에 대한 인상은?
"한국어에서 ‘사랑해’라는 표현은, 일종의 친밀한 느낌을 담고 있어, 마치 서로만 아는 비밀처럼 사랑을 전합니다. 프랑스어로는 ‘Je t’aime’라고 하는데, 매우 직설적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나에서 너로 향하는 화살과 같습니다. 한국어 ‘사랑해’를 단어대로 풀이하면 ‘사랑을 한다’입니다. 단순한 감정이나 고백이 아니라, 행동, 즉 사랑을 움직이게 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뉘앙스가 생깁니다. 한쪽은 프랑스어처럼 사랑을 선언하고, 다른 한쪽은 한국어처럼 사랑을 실천합니다. 한쪽은 마음의 움직임을, 다른 한쪽은 행동과 실천을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자, 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세상 속에서 상대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두 접근 방식은 서로를 보완하며, 우리의 공통된 시각을 풍요롭게 하고, 협업을 위한 소중한 창작적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이번 140주년을 맞아, ‘사랑해 벽’이 우리 두 민족 사이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위한 새로운 시적 매체를 찾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국의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초대하여 일상용품이나 예술 작품을 새롭게 창작하거나 재해석하게 하고, 그것들이 ‘사랑해’라는 시를 담는 새로운 매체가 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단순히 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창작물 속에서 작품을 구현하여 여행하고, 순환하며, 새로운 관객에게 닿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클레르 키토 역시 이번 여정에 함께합니다. 그녀는 서예를 공부했으며, 특히 한국의 서예가 이응노 선생에게 배웠습니다. 그녀의 필획과 붓질, 글자의 흔적에 대한 감수성은 매우 소중합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하며 예술적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한국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사랑해 벽’은 단순히 파리의 기념물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협력을 통해, 한국과 전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의 사랑 작품이 순환하고 확산되기를 희망합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작품 확장을 계획하고 계시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이 아이디어는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에는 20만 명 이상이 완전히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약 100만 명이 심각한 시각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은 ‘사랑해 벽’에 새겨진 글자의 미적 가치를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밖에 접할 수 없습니다. 벽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작품으로 소개되지만, 시각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촉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흔적과 진동을 남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글자가 입체로 새겨진 벽이나, 손끝으로 사랑의 단어들이 모여 있는 조형물을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상상하는 것은 작품을 다른 감각으로 열어주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전체 경험을 풍부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이 있는 사람에게도, 눈으로 보는 것과 손으로 느끼는 ‘사랑해’는 다른 경험이 됩니다. 시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관문이 열리는 셈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여전히 '사랑해'를 수집하시나요?
"아니요, ‘사랑해 벽’의 탄생부터 수집을 중단했습니다. 처음부터 제게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만난 사람들의 다양성, 글씨의 다양성, 그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미래의 조합을 약속하는 책, 노래, 벽의 흔적이었습니다. 각각의 ‘사랑해’는 단순히 집을 나서는 것만으로, 단순히 집을 나서며 시작한 제 세계 여행 속 한 정거장이자, 진행 중인 작품과 앞으로의 작품 정신이 담긴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결코 포괄적이거나 과학적 언어 목록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닙니다. 늘 시적인 행위였습니다. ‘사랑해 벽’은 311개의 글씨, 약 250개의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전 세계 6,000~7,000개의 언어와 비교하면 적은 수이지만, 충분히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시적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별이 가득한 하늘처럼, 끊임없이 하나의 단순하고 무한한 메시지를 속삭입니다: "사랑해.""
▷만약 100년 후에도 이 벽이 남아 있다면, 다음 세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를 바라시나요?
"만약 ‘사랑해 벽’이 앞으로 100년 동안 존재한다면, 저는 그것이 그 자체로 충분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우리를 연결하는 것을 더 많이 바라봐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더 존중하며, 더 평화롭게 만듭니다. 사랑은 개인을 넘어서는 힘이며, 인간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열어 줍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타인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벽은 언어와 문화, 글씨의 차이 너머에 우리가 공유하는 핵심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사랑으로’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에는 창조적 힘이 될 수도 있고, 파괴적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이중성이 존재합니다. 제가 바라기로는, 100년 후에도 벽이 계속 전해 주길 바라는 것은 사랑이 우리를 서로 가까이하게 한다는 확신입니다. 모두가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사랑해 벽’이 여전히 연결하고 세우는 힘의 상징으로 남기를, 우리를 하나로 모으고, 나눔과 사랑, 형제애에 열려 있는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프레데릭 바롱의 ‘사랑해 벽’ 프로젝트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 공통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그의 말처럼, ‘마음의 문법’야말로 진정한 소통의 열쇠가 아닐까? 바롱의 작업은 이제 몽마르트르 한 모퉁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한국과의 문화 교류 프로젝트를 통해 ‘사랑해 벽’의 개념을 확장하며, 2026년 한불수교 140주년을 맞아 양국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으로 다시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순간을 준비하고 있다.
파리 몽마르트르의 작은 벽이 전하는 울림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보여준다. 작은 손 글씨 하나하나, 사람들의 진심 어린 ‘사랑해’가 모여 거대한 감정의 우주를 만들어내듯, 우리 일상의 사소한 시작과 작은 마음이 세상에 닿을 때, 비로소 예상치 못한 변화와 연결이 이루어진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진 단순함 속에 인류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결될 수 있는 깊은 힘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먼 나라와 다른 언어, 세대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희망이자 약속임을 상기시킨다.
파리=한지수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