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던 강아지가 눈앞에서…" 산불이 남긴 끔찍한 '트라우마' [현장+]

2 days ago 7

곽 씨가 키우던 반려견이 불에 타 죽은 사진/사진=곽 씨 제공

곽 씨가 키우던 반려견이 불에 타 죽은 사진/사진=곽 씨 제공

"강아지가 불에 타 죽는 걸 봤어요. 집도 다 탔고…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30일 경북지역을 덮은 주불이 진화됐지만, 이재민들의 삶은 아직도 불길 속에 갇혀 있다. 마음 속 재난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전날 경북 의성군 의성 실내체육관, 최대 190명이 머물렀던 곳엔 몇십명의 이재민만이 남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집이 전소됐거나, 귀가 허가를 받지 못해 돌아가지 못한 상태다. 귀가하려면 읍내에서 안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곳에서 이재민들의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상담가들은 재난을 직접 겪은 이재민들이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한적십자사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관계자는 "불 난 직후보다 지금이 더 위험한 시기다. 일주일쯤 지나면 현실을 인식하면서 트라우마가 깊어지고, 일부에선 ‘죽고 싶다’는 말도 나온다"며 "이곳 대피소에 있는 분들 대부분이 심리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화한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엔 정신적 충격도 훨씬 심각하다”며 “현장 상담은 물론, 향후에는 이재민이 거주하는 지역과 연계한 지속적인 심리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성실내체육관에서는 이재민들을 위해 응급의료지원, 한의진료, 무료 간식, 휴대폰 충전과 함께 재난 심리 상담소 등을 운영했다.

곽 씨 부부의 전소된 트랙터/사진=곽 씨 제공

곽 씨 부부의 전소된 트랙터/사진=곽 씨 제공

지난 28일 의성군 중리3동에 거주하던 곽윤숙(70) 씨는 얼굴이 탈 정도로 불길과 싸웠던 순간을 생생히 떠올렸다. 지난 22일 오후, 불길을 피해 황급히 대피했지만, 집과 농기계는 모두 불에 탔다. 트랙터, 경운기, 관리기, 마늘 재배 기계 등 생계 수단이던 장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곽 씨는 "집이 내려앉았고, 오래된 본채는 아예 무너져 내렸다. 불을 끄겠다고 나섰다가 얼굴이 까맣게 탈 정도였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대피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산소호흡기를 착용했다"며 "키우던 강아지와 새끼 밴 염소 세 마리, 닭 여섯 마리도 모두 눈앞에서 죽었다. 불 속에서 터진 트럭 바퀴도 내가 새로 교체한 지 얼마 안 된 거였다”고 울먹였다.

대피소에서 만난 조대래(86)·조현규(54) 부자도 여전히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며 심리적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아버지 조 씨는 "불이 났을 때 그냥 뛰쳐나왔다. 회관으로 피신했다가 이곳 대피소로 왔다. 집은 다 타버렸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갈 곳이 있어야 사람답게 사는 건데, 너무 절망스럽고 매일 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큰아들은 안동에서 일하는데 그쪽도 산불이나 오지 못했다"며 "집과 함께 생계 수단이던 안에 있던 전 재산이 모두 전소돼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차도 없어서 집에 가볼 수도 없다”며 현실의 벽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대규모 재해로 인해 반려동물이나 가축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경험, 재산 피해를 입은 기억은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양용준 오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이번 산불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반려동물이나 가축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거나 재산 피해를 겪는 경험은 극심한 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재난 직후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은 일시적인 급성 스트레스 반응일 수 있지만, 한 달 이상 지속되면 PTSD는 물론 주요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 알코올 사용 장애 등으로 악화할 수 있어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 원장은 "이런 경험은 뇌의 신경 전달물질계와 내분비계에 영향을 주고, 해마와 편도체 등의 기능 변화로 인해 끔찍한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게 된다"며 "특히 집이 화재에 휩싸인 장면처럼 강렬한 시각적 충격은 뇌에 각인되며, '모든 걸 잃었다', '망했다'는 식의 파국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21일 시작된 산불은 초속 10m가 넘는 강풍을 타고 경북과 경남 지역으로 확산했다. 이번 산불로 30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산불 피해 영향구역은 총 4만8000여 핵타르(ha)로 축구장 2602개와 맞먹는다. 주택 3000여동이 전소됐으며 국가 유산 피해 30건, 농업시설 2000여건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중대본에 따르면 이날 오후 기준 213시간 만에 경북·경남 산불의 주불이 모두 진화됐다.

경북 의성=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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