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프레임에서 캔버스 천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흘러내린다. 이 천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겨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천을 당기는 사람은 천에 가려져 있고, 뒤에서 비치는 환한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비친다. 사람의 그림자만 드러날 뿐 이 사람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더 묘한 대목은 바로 나무 프레임이다. 현실에서라면 이 프레임을 받치는 이젤이 설치됐겠지만, 그림 속에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아 초상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또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을 그려 초현실주의 추상화 같기도 한.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40)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에 선보인 작품 ‘땅거미’다.
아일랜드 출신인 오케인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을 둘러매고 씨름하는 성인 남성, 이 천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신작들을 공개했다.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상상의 내면세계로 초대한다.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와 씨름하는 남성은 자기 모습을, 어린아이들은 조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캔버스 뒤로 가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수백 장의 컷을 기록한다”며 “마지막에는 10여 장의 장면을 추려서 고민하는데,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에게 가장 끌리는 최종본을 골라 그림으로 만든다”고 했다.예술 작품, 특히 회화의 의미나 개념을 고민하고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주제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설치나 오브제로 표현했다면,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은 이를 뛰어난 기교를 갖춘 회화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름진 캔버스, 사실적인 인체 표현,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넣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케인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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