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한강의 북향 정원 식물들은 ‘거울햇빛’을 쬐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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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후 한강 작가 첫 신작… 일상적 산문-시 각각 6편 수록
정원 가꾸며 써낸 내밀한 일기… 글쓰기에 대한 소명 의식 담아
◇빛과 실/한강 지음/172쪽·1만5000원·문학과지성사


소설가는 ‘나’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잘 없다.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말하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일상의 감흥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낸 산문은 그래서 반갑다. 그 소설가가 지난해 한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라면 더.

한강 작가의 신작 산문집 ‘빛과 실’이 24일 출간됐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펴낸 첫 책이다. 여섯 편의 산문과 여섯 편의 시를 묶었다. 이 중 북향 정원에서 식물을 키우며 쓴 산문 ‘북향 정원’, 네 평짜리 마당에 정원을 가꾸며 쓴 일기를 모은 ‘정원 일기’, 글쓰기에 대한 자세를 담은 ‘더 살아낸 뒤’가 미발표작이다. 전체 책 분량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 이전에 쓰였다.

한강 작가가 8세 때 자필로 쓴 시. 문학과지성사 제공

한강 작가가 8세 때 자필로 쓴 시. 문학과지성사 제공
가장 눈길이 가는 꼭지는 산문 ‘북향 정원’이다. 일조량이 적은 북향의 정원에서 뿌리를 내리는 식물들과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작가는 북쪽 벽에 붙인 화단에 빛을 쪼이기 위해 여덟 개의 탁상용 거울을 들인다. 15분에 한 번씩 거울의 각도를 옮겨주며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를 감각하고, 사흘에 한 번씩 거울 위치를 바꿔주며 공전하는 속도를 감각한다.이처럼 ‘거울 햇빛’이 드는 정원을 가꾸면서 2021∼2023년 ‘정원 일기’를 썼다. 작가는 단풍나무보다 빨리 자라며 단풍잎을 가리는 불두화와 라일락을 보면서 “학급에서 가장 내성적인 아이를 지켜보는 담임선생님처럼” 단풍나무를 보호하고 싶어진다고 표현한다. 어떤 자연 앞에선 수식어도 불필요한지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무지근할 때도 있다”고 단순한 감탄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간 작가의 작품을 좇아온 독자라면 반가울 장면도 군데군데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을 앞두고 쓴 2021년 4월 26일의 일기에 그는 “칠 년 동안 써온 소설을 완성했다. USB 메모리를 청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저녁 내내 걸었다”고 적었다. 산문 중간중간 작가가 휴대전화로 직접 찍은 식물 사진도 실렸다.

‘거울 햇빛’을 보며 자라는 북향 정원의 식물들. 햇빛이 거울을 지나갈 때 창문 같은 빛이 벽에 비친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거울 햇빛’을 보며 자라는 북향 정원의 식물들. 햇빛이 거울을 지나갈 때 창문 같은 빛이 벽에 비친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책의 맨 마지막 시 ‘더 살아낸 뒤’에는 글쓰기에 대한 소명 의식을 담았다.“더 살아낸 뒤/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글쓰기로.)//사람들을 만났어./아주 깊게. 진하게./(글쓰기로.)//충분히 살아냈어./(글쓰기로.)//햇빛./햇빛을 오래 바라봤어.”소설가 한강이 1인칭 ‘나’의 시점에서 기록한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노벨 문학상 발표 직후 열린 포니정 시상식에서 작가들의 황금기가 60세까지라고 가정할 때 자신에겐 6년이 남았고,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산문집에 함께 수록된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의 한 구절을 음미하게 한다.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입니다. …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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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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