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빅뱅 이전에 화이트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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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카를로 로벨리 지음·김정훈 옮김·이중원 감수/196쪽·1만8000원·쌤앤파커스



빅뱅으로부터 우주가 태동했다는 것은 그동안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 굳건한 믿음을 머잖아 폐기해야 한다면 어떨까. 빅뱅이 ‘화이트홀’의 반등으로 형성됐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우주, 다시 말해 ‘우리’는 빅뱅으로 태어나 블랙홀의 종말로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화이트홀로 환생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인 저자는 양자 이론과 중력 이론을 결합한 ‘루프 양자 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다.

과학과 철학, 예술을 넘나들며 완급을 조절한 베스트셀러들을 냈던 작가답게 책 전반에 걸쳐 13세기 단테의 ‘신곡’을 물리 이론에 빗댐으로써 우주의 경이를 직관적으로 와닿게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의 끝’을 루프 양자 중력 방정식을 통해 넘어서는 부분은 ‘신곡’의 천국편 제1곡과 연결했다. 단테가 연옥의 산 너머 우주의 끝자락을 넘어서는 순간 “여기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저기서는 허용된다”고 말하는 대목은 블랙홀에서 화이트홀로 전환될 때의 변화를 문학적으로 제시한다.

블랙홀의 지평선에 관한 이론에 철학적 사유를 더해 인생을 바라보는 새 관점도 제공해 준다. 책은 구 모양의 지구에 ‘진짜 위, 진짜 아래’가 없듯 ‘절대적 시간’이란 없다고 강조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에 각자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일흔을 목전에 둔 과학자로서 터득한 깨달음까지 진하게 담아냈다. 과학은 겸손함과 오만함을 모두 필요로 하는 달콤쌉싸름한 것이며 “진짜 어려움은 새로운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당연해 보이는 오래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

친절한 설명으로 물리학에 문외한인 독자는 물론이고 최근 가장 논쟁적인 가설까지 다룸으로써 전문성 있는 독자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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