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버지니아 울프의 편지… 100년 뒤에 읽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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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4000통 중 96통 추려
자유-주체적 삶에 대한 갈망… 이 시대에도 생생하게 와닿아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버지니아 울프 지음·박신현 옮김/384쪽·1만8000원·북다

“여성은 경험의 자유를 가져야만 합니다. 남성들만큼 자유롭게, 조롱과 겸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생각하고 발명해야 합니다.”

20세기 초 영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1920년 10월 16일 시사·문예지 ‘뉴 스테이츠먼’ 편집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앞서 뉴 스테이츠먼에 ‘남성이 여성에 비해 창조성 면에서 우월하다’는 내용의 책을 옹호하는 서평이 실렸기 때문이다. 문제의 서평은 ‘기원전 600년부터 18세기까지 천재적인 여성 작가가 없었다’는 근거를 들며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했다.

울프는 그리스 레스보스섬 출신의 여류 시인 사포를 예로 들어 이를 반박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하다고 평가한 시인 중 한 명인 사포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덕에 시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었다. 울프는 “다른 여성들도 실력 발휘가 강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다면 글쓰기와 음악, 회화에서 제대로 재능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엄격한 가부장제에 속박돼 예술인으로서의 자아를 갖기 어려웠던 당시 여성들의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신간은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울프가 남긴 편지 4000여 통 가운데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96통을 골라 엮은 것이다. 울프가 동성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와 주고받은 서신 일부는 국내에 번역된 적이 있지만 그녀의 언니 버네사 벨, 남편 레너드 울프를 비롯한 주변 예술인들과 교류한 편지가 번역된 건 처음이다. 책은 ‘자유(1882∼1922년)’, ‘상상력(1923∼1931년)’, ‘평화(1932∼1941년)’ 등 울프가 삶의 시기에 따라 갈망했던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생전에 “편지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했던 울프에게 편지는 사랑과 우정의 표현 수단이자 아이디어가 오가는 주요 통로였다. 그는 여성으로서 결혼을 고민하고, 작가로서 독자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며 꿋꿋이 창작을 해나간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파시즘에 저항한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보이고, 연인에게는 성 정체성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런 다채로운 면모는 ‘자유는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던 울프의 철학과 맞닿는다.

대중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그의 다층성도 흥미롭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사회적 약자였지만 사회적 계급에선 중상류층이었다. “왜 나는 신사 계급보다 노동자를 훨씬 더 꺼릴까”라고 자문하는 모습에선 자신의 계급의식을 성찰하는 솔직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 울프가 1929년 발표한 수필집 ‘자기만의 방’에 쓴 내용이다. 신간에선 여성의 글쓰기가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자신만의 신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간 울프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정제된 문학작품과는 다른, 톡톡 튀고 사랑스러운 문체는 편지글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한 세기 전 작가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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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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