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느 영화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2025고양국제꽃박람회에 가보고서요. 1997년부터 열린 국내 원예박람회의 효시 격인 이 박람회를 아주 오래전에 가본 후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알록달록 꽃들을 심어놨겠지, 관광버스를 타고 온 관람객들로 북적대겠지…. 이번에 가보니 꽃도 많고 사람도 많았는데, 무엇보다 꽃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표정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꽃 박람회를 위해 수고하고 고민하는 노력을 보았습니다.
올해 ‘꽃, 상상, 그리고 향기’라는 주제로 11일까지 열리는 제17회 2025고양국제꽃박람회를 두 번 다녀왔습니다. 한 번은 이른 오전에, 한 번은 오후에요. 가능하다면 오전 방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호숫가의 고즈넉한 아침 기운과 꽃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되더라고요. 호숫가를 따라 펼쳐지는 ‘숲멍 피크닉 가든’도 꼭 가보세요.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선물 같은 오월의 햇살과 바람결을 느껴보세요.
장미원 뒤쪽 메타세쿼이아 숲길에는 지난해 황지해 작가가 조성한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라는 이름의 작가 정원이 있습니다. 60m의 긴 벤치가 놓여있고, 바람 부는 방향을 사랑한다는 여리고도 강해 보이는 바람꽃이 심어있어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많은 생각과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덩그러니 앉거나 누워서 쉴 수 있는 쉼이 필요한 모두의 벤치에요. 숲이 제공한 하늘호수와 바람, 햇살, 그늘 쉼을 통해 본연에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숲 안에 작지만 분명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독이는 시간, 내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알아차리는 공간이길 바랍니다.’
화분들이 걸려있는 꽃 터널을 지나는데 마침 분무가 진행됐습니다. 아침 햇살과 수증기가 만나 이뤄내는 분위기가 환상적이었어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한 장면 아닐까 잠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요, 분위기! 정원만큼 분위기가 중요한 장소가 또 있을까요. 예전의 고양국제꽃박람회가 떠들썩한 장터 같았다면 지금은 좀 더 차분한 분위기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원은 누구나 각기 다른 분위기의 답안지를 갖는 주관식 문제가 아닐까 해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기억을 소환하며 무엇을 느낄 것인가.
클레마티스 정원에서는 ‘라플레르’ 김명규 대표를 만났습니다. 이 박람회 초창기 때부터 참여해 전시와 심사 등을 맡고 있다는데요. 자작나무 100그루와 700본이 넘는 클레마티스로 꽃의 궁전을 만들고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친구들끼리 구경 온 50, 60대 여성분들이 특히 좋아하세요. 제가 만든 꽃 작품에 행복해하는 분들을 보는 게 좋아서 매년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 어린이를 동반한 30대 가족에게 특히 인기 있는 장소는 황금빛 판다를 메인 조형물로 설치한 ‘꿈꾸는 정원’과 ‘알록달록 티니핑 정원’입니다. 노란색과 흰색의 비올라 50만 송이로 티니핑 캐릭터 꽃탑을 만든 정성의 손길을 떠올려봅니다. 장미원 지나 호숫가 쪽으로는 ‘고양로컬가든’이 있습니다. 고양시 300여 개 농가에서 생산하는 식물들로 연출한 곳인데요. 튤립이 심어진 호숫가에서 ‘물멍’하기에 좋아 보입니다.
고양국제꽃박람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세계원예생산자들의 국제기구인 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로부터 국제원예전시회와 국제원예무역전시회 등급을 동시에 인정받았습니다. 축제로서의 꽃 박람회이자 비즈니스로서의 무역 박람회라는 뜻입니다. 박람회장에서 만난 충남 당진 농업회사법인 ‘초록에서’의 전태평 대표는 수직정원 시스템인 ‘바이오월 허니’를 개발해 선보이고 있습니다. 토양 재배와 수경 재배의 장점을 통합해 식물을 벽면에 심고 태양광을 공급해 딸기와 상추도 키워냅니다. 지난해 고양국제꽃박람회의 전체 화훼류 비즈니스 상담 계약은 200건 230만 달러. 25개국 200개 기관과 단체 등이 참여한 올해에는 더 많은 업체들이 더 좋은 성과를 거둬 꽃을 통한 도시 브랜딩의 모범 사례가 됐으면 합니다.
이 박람회는 세계적 기후위기 속에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화려한 꽃들은 우리를 꿈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주지만 박람회가 끝나면 사라지게 됩니다. 이번 박람회 중 열린 공공정원 컨퍼런스에서는 박람회가 끝나면 폐기될 운명의 꽃들을 사회복지시설 등에 기부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 박람회에서 일년초보다 다년초 식물을 더 활용해야겠죠. 식물을 수입할 때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을 절감하기 위해 기후 적응력이 높은 국내 자생식물 재배와 활용을 정책적으로 더 장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의미 있게 들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다녀온 싱가폴 정원박람회가 떠올랐습니다. 아파트에서 적용 가능한 다양한 실내정원 사례가 식물로 연출돼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꽃 박람회도 좀 더 문화를 접목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양국제꽃박람회도 일회성 행복을 넘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이끄는 세계적 꽃 박람회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고양=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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