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6층 주차장에서 투명인간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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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국립극단의 창작연극 실험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향동의 한 건물을 찾았다. 움직이는 차 한 대 없이 고요한 지상 6층 주차장. '여기서 공연을 한다고?'라는 의문도 잠시, 주차장 벽면의 문을 열자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찬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이 이날 선보인 정세영 연출의 '소실점의 후퇴'는 극장의 경계를 일상적이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확장시킨 작품이다. 주차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지만 극장으로서는 그동안 시도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전통적으로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은 객석과 무대가 액자형 프레임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펼쳐진다. 관객은 오직 정면에서만 무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무대의 깊이에 따라 원근법이 표현되고, 무대 위 배우들은 소실점 너머로 퇴장하는 연출이 관습처럼 사용된다.

최근에는 까만 사각형 공간에서 무대와 객석의 구조가 자유롭게 변형되는 '블랙박스 무대'도 생겨났지만, 이번 작품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주차장과 연결된 실내는 일반적인 극장처럼 층고가 높으면서도 원근법이나 소실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문 너머의 주차장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정 연출은 "현대 공연예술에서 원근법과 소실점의 개념을 재검토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는 무대 표현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 한 남성과 투명인간이 병실 내 침대에 앉아있다./사진=국립극단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 한 남성과 투명인간이 병실 내 침대에 앉아있다./사진=국립극단

연극은 어찌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병상에 누워있는 '투명인간'이 한 인간과 함께 격리시설을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정 연출은 '권력'을 상징하는 시선의 주체(관객)에 대해 생각하다가 시선의 대상(배우)이 모두에게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을 떠올렸다.

관건은 투명인간이 눈앞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걸 관객들이 믿게 하는 것. 이 같은 허구적 설정을 납득시키기 위해 정 연출은 공감각적 심상을 불러온다. '이젠 내 사랑이 되어줘. 내 모든 걸 너에게 기대고 싶어…'라는 노래 가사가 벽면에 띄워지면, 관객들은 가사를 통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느낀다.

이때 음악(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소리를 키우며 그 존재를 증명한다. 조금 전까지 속으로 흥얼거리던 노래가 실제로 귓가에 닿는 순간, 투명인간 역시 보이진 않아도 여기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얀 연기와 함께 피부에 와닿는다. 침대가 위아래로 움직일 때는 그 위에 누워있는 투명인간의 실루엣이 그려질 정도로 투명인간의 존재에 적응하게 된다. 정 연출은 우리 눈에 보이게 된 투명인간을 통해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 한 차량이 타임루프 속에서 무한 질주하고 있다./사진=국립극단

창작연극 <소실점의 후퇴>의 한 장면. 한 차량이 타임루프 속에서 무한 질주하고 있다./사진=국립극단

극은 투명인간을 태운 자동차가 주차장을 돌고 도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기존의 연극 문법에서 벗어난 것으로, 새로운 극장 형태였기에 가능했다.

"프로시니엄 극장들이 사라지면서 기존 극장의 특징이나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기존 방식들을 새로 정의하고 실험해볼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번 연극은 형식과 내용에 얽매이지 않는 연극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국립극단이 기획한 '창작트랙 180°'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국립극단은 이 사업으로 매년 두 명의 예술가를 지원한다. 결과물은 정식 무대에 올리지 않고 이날처럼 발표회에서만 공유해도 된다. 정 연출은 "그동안에는 비언어적이고 시각적인 작업을 많이 했는데 앞으로는 언어 기반의 작업을 하고 싶다"며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크다"고 말했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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