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다른 이름은 ‘자유’[내가 만난 명문장/조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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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닙니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색깔 없는 팔색조가 고통으로 울지만, 인생은 벌써 알록달록한 아홉 가지 색깔을 마련해 두었다.”

―박판식 ‘전락’ 중

조성래 시인

조성래 시인
박판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에 실린 시의 일부다. 한참 습작기를 지나던 나는 시인이 구사하는 토속적인 미감과 그의 철학적인 성찰을 참 좋아했다. 오래전 이 구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어두기까지 했는데, 왜 내가 이 문장을 사랑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본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부족함’으로 인한 괴로움을 준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잠이 부족하며 때로는 사랑이 절실하다. 우리는 결핍으로 인해 불행해진다.

그러나 결핍은 그나마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 문제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마련해 둠으로써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도 준다. 동시에 들이닥치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우리는 단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한 점 위에 놓인 찰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의 감정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마련해 두었기에 일어나는 좌절일 것이다. 이 좌절의 다른 이름은 자유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해 두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에 관해 천착한다. 또한 우주는 한 인간에 대해, 혹은 전 인류에 대해 얼마나 과잉한가? 2023년 7월 1일에 발사된 유클리드 망원경이 포착해 낸 우주 지도의 1%에는 무려 1400만 개의 ‘은하’가 들어 있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시절, 빈 영수증 뒷면에 ‘신은 한 사람이 다 못 누릴 만큼의 많은 것을 그의 생에 마련해 두었다. 그가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할 만큼의’라는 문장을 써 놓은 적이 있다. 아마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박판식 시인의 문장이 발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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