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과 라벨을 만난 클리브랜드 음악 여행

1 day ago 1

4개월 전 어느 날, 미국 클리브랜드에서 열리는 조성진 콘서트 잔여석을 찾아보고 있었다. 운 좋게 발견한 2열 중앙 좌석이 이 여행의 시작점이었다.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듣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미국에서 차로 왕복 12시간은 마치 서울에서 대전 성심당에 빵 사러 다녀오는 것만큼 가뿐한 일. 망설일 것 없이 바로 티켓을 구매했다.

건반이 눌러지기 전부터 음악은 이미 시작되었듯,1)나의 여행도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시작된다. 동행자를 구해보고, 가보고 싶은 미술관을 찾아보고, 공연 프로그램을 익히며, 때마침 출시된 조성진의 라벨 협주곡 CD를 듣는 이 모든 준비 과정 자체가 여행의 즐거움이니 나에겐 기다림마저 여행의 일부가 된다.

레고 미니 피규어 '조성진 & 라벨과 그의 고양이' / 사진. © 고지현

레고 미니 피규어 '조성진 & 라벨과 그의 고양이' / 사진. © 고지현

그리고 출발 2주 전,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조성진 라벨 솔로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고 난 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더 커졌다. 라벨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투명한 분위기는 조성진의 절제된 감성과 유려한 선율을 통해 세 시간 동안 아름답게 펼쳐졌고, 라벨 음악이 지닌 미묘한 색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정과 프로그램 탓이겠지만 단 하루뿐인 공연이었기에 아쉬움이 컸고, 그만큼 클리브랜드 여행이 더욱 기다려졌다.

세브란스 뮤직 센터

드디어 여행 당일, 6시간의 수다로 동행자와 나의 목소리가 갈라질 때쯤 우리는 클리브랜드에 도착했다. 처음 마주한 세브란스 뮤직 센터2)는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1층 로비는 소박했지만, 연주가 열리는 2층의 메인 뮤직 홀은 우아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았고, 기품 있는 고전미가 마치 세련된 품격의 귀부인을 보는 듯했다.

Severance Music Center Mandel Concert Hall / 사진 출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페이스북

Severance Music Center Mandel Concert Hall / 사진 출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페이스북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 라벨
<스페인 광시곡(Rhapsodie espagnole)>

세브란스 뮤직 센터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는 미국 빅5(Big Five)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뛰어난 연주력과 품격 있는 사운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닌 클리브랜드의 자랑이다. 공연의 시작은 라벨의 <스페인 광시곡>. 첫날은 2층 드레스 서클3)에서 관람한 덕에 사운드가 더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들렸다. 이국적인 색채감과 리듬의 변화가 돋보이는 이 작품을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는 그 명성답게 정교하면서도 감각적인 해석으로 표현해냈다.

조성진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

드디어 여행 중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다. 인상주의와 재즈가 조화를 이루는 라벨 <피아노 협주곡 G 장조>는 세련된 오케스트레이션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특히 2악장은 다른 악장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서정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듣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Adagio assai(매우 느리게), 조성진의 솔로 연주로 시작되는 2악장은 절제된 섬세함 속, 한음 한음이 공간에 스며들 듯 퍼져나간다. 3분여의 피아노 독백을 듣다 보면 그 아련함이 온 감각에 배어든다. 절제된 감정 속 더욱 깊이 느껴지는 서정성과 애절함이 오케스트라와의 대화 속에서 점점 깊은 감동을 만들어 낸다. 라벨은 이 악장에서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이끌어가며, 고요하고 평화로우면서도 때로는 우울한 서정적인 느낌을 강조해 냈다. 그리고 그가 그려낸 감정의 모든 결이 조성진의 손끝에서 완벽하게 펼쳐졌다.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 M. 83: II. Adagio assai]

공연의 마지막,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Tchaikovsky symphony No. 4)>

차이코프스키가 순탄치 않았던 인생의 시기에 완성한 이 교향곡은, 강렬한 도입부를 시작으로 작품 전체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며 고뇌하는 작곡가의 내면이 잘 담긴 작품이다.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는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사운드로 그의 복잡한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었으며, 특히 4악장의 폭발적인 피날레는 운명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이는 차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공연의 감동을 가슴에 안고 여행의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클리브랜드의 또 다른 자랑
클리브랜드 미술관 (Cleveland Museum of Art)

다음날은 하루 종일 클리브랜드 미술관을 거닐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다양하고 수준 높은 작품들과 그 방대한 전시 규모에 감탄이 나왔다. 모네, 반 고흐, 램브란트, 로뎅을 비롯한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고대 이집트 유물부터 한국관, 그리고 피카소 특별전까지 전시되고 있어 클리브랜드에 간다면 꼭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무엇보다 세브란스 뮤직 홀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이니 코스 짜기에도 최적의 동선이다. 미술관을 나선 나도 1분의 총총걸음 후 뮤직 센터에 도착했다.

3월7일 클리브랜드 공연 / 사진. © 고지현

3월7일 클리브랜드 공연 / 사진. © 고지현

라벨 탄생 150주년, 다시 한번 더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

오늘은 라벨 탄생 150주년 생일이다. 이런 날에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벨을 듣는다니 이보다 더 완벽하게 라벨을 기념하는 방식이 있을까. 좌석은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던 2열 중앙. 예상과 달리 피아노를 치는 조성진의 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리였지만, 그 덕분에 온전히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표정의 변화가 큰 편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음악으로 표현되는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듯 하다. 차분한 표정 속 느껴지는 명상적인 분위기. 마치 얼굴로도 음악이 들리는 듯 섬세하고 깊이 있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연주를 방해할 수 없는, 깊은 몰입과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 그의 얼굴에서 작곡가 라벨과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구도자의 표정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1박 2일 음악 여행의 마무리

콘서트가 끝나고 운 좋게 조성진을 만날 수 있었다. 형편없는 사진 실력의 스태프 덕분에 얻게 된 심령사진은, 입이 귀에 걸린 잔뜩 상기된 얼굴이 가려져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났다. 간신히 모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6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하니 새벽 5시. 지친 몸을 뉘이며 나는 벌써 내년 클리브랜드 여행을 상상해 본다.

고지현 음악 칼럼니스트

1. 숏츠 [바로보기]
2.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뮤직 센터, 1931년에 세브란스 가문의 기부로 설립되었다.
3. 극장에서 주로 1층과 2층 사이의 좌석 구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상류층이 앉던 자리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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