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에 자신이 연루돼 있다는 의혹을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강력 반발하며 WSJ의 모회사 격인 뉴스코퍼레이션의 루퍼트 머독 명예회장을 상대로 100억달러 규모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한때 최측근에서 이제는 정적이 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역시 트럼프 정부가 ‘엡스타인 파일’을 처리한 방식을 연일 비판하며 공격을 재개하는 등 엡스타인 관련 의혹이 미 정가를 뒤흔들고 있다.
◇트럼프, 머독 상대 소송
WSJ는 트럼프 대통령이 2003년 엡스타인의 50세 생일을 맞아 외설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편지를 보냈다고 지난 17일 보도했다. 트럼프의 이름이 적힌 편지에는 굵은 마커로 직접 그린 듯한 나체 여성 그림이 있었고 ‘도널드’라는 서명이 여성의 허리 밑에 체모를 모방한 방식으로 휘갈겨져 있다고 WSJ는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측은 자신과 엡스타인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이 기사 보도를 막기 위해 수차례 머독을 포함한 언론사 관계자와 접촉했다. 기사가 나가기 전인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WSJ에 “이런 편지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며 “이것은 가짜 기사”라고 주장했다. 기사가 나갈 경우 소송을 걸 것이라 말했다고 WSJ는 썼다. 결국 17일 기사가 나왔고, 트럼프 대통령은 격노하며 SNS에 “대통령 본인이 그 편지가 가짜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WSJ가 허위고 악의적이며 명예훼손인 기사를 내보냈다”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WSJ 기자 두 명과 발행사 다우존스, 뉴스코퍼레이션, 머독 명예회장 등을 상대로 연방 명예훼손법에 따라 100억달러(약 14조원) 규모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재정과 평판 측면에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뉴스코퍼레이션 측은 “어떤 소송에도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충성 지지층 균열 조짐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체포된 뒤 2019년 교도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그에게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포함된 성 접대 리스트가 있다거나, 리스트에 포함된 거물들이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까 우려해 엡스타인을 살해한 것이라는 등의 음모론이 돌았다. 특히 트럼프 강성 지지층이 이 음모론을 지지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관련 문건을 공개하겠다며 지지층을 결집했다.
하지만 지난 7일 법무부가 ‘엡스타인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하자 반발이 거세졌다. 2월 팸 본디 법무장관이 “엡스타인 리스트를 지금 내 책상에 앉아 들여다보는 중”이라고 했는데 법무부 발표는 그의 과거 발언과 엇갈렸기 때문이다. 이에 트럼프 지지층 내부에서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말라”며 자제를 촉구했음에도 공화당 인사들까지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폭로성 기사까지 터지며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그의 그림 여러 점이 경매에서 판매된 사실이 확인됐다. BBC는 “엡스타인 문건을 공개하자고 했다가, 아예 문건이 없다고도 했다가, 남은 문건은 전부 사기라고 주장하는 식의 말 바꾸기는 그를 숨길 것이 있는 인물로 보이게 한다”고 꼬집었다.
이번 소송으로 머독 명예회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머독 명예회장이 소유한 폭스뉴스 출신 인사를 정부 요직에 대거 기용했고 인터뷰에도 자주 응했다. FT는 “미국 우파를 만든 두 사람의 결속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WSJ 보도는 트럼프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내에서 점점 지지를 잃어가고 있는지 시험하는 신호”라고 전했다.
머스크 CEO는 지난달 엡스타인 성 추문 사건에 트럼프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취지의 글을 SNS에 써 이 문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올렸다. 법무부 발표에 머스크 CEO는 “명백한 은폐”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엡스타인 파일을 처리한 방식에 대한 비판의 글을 쏟아냈다.
한경제 기자 hank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