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시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자신의 의지로만 완성할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되는 시간이죠. 더 좋은 배우, 더 나은 연기를 보여드리기 위해 고민하고 애써요. 저를 질책하거나 갉아먹는게 아닌 제 마음 안의 사랑과 감사를 담아 잘 쓰일 수 있게 노력하려고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걷겠습니다."
배우 전여빈의 해가 시작됐다. 500만 관객을 목전에 둔 영화 '하얼빈'에 '검은 수녀들'까지, 연달아 작품을 선보이게 된 전여빈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사회도 영화계도 안정된 분위기는 아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극장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오는 24일 개봉하는 ‘검은 수녀들’(권혁재 감독)은 강력한 악령에 사로잡힌 소년을 구하기 위해 금지된 의식에 나서는 유니아(송혜교), 미카엘라(전여빈) 수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2015년 장재현 감독의 연출로 개봉된 '검은 사제들'의 스핀오프로 김신부(김윤석)와 최부제(강동원)가 부재한 상황에서 구마가 허락되지 않은 수녀들이 금지된 의식에 나선다는 설정이다.
전여빈은 어릴 적부터 귀태(귀신이 갖게 한 아이)로 내적인 혼란을 안고 살다 유니아를 만나 구마를 받아들이는 미카엘라를 연기했다. 송혜교와 이른바 '혐관'(혐오 관계)에서 '워맨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선을 나눴다.
전여빈은 '하얼빈'과 '검은 수녀들'을 떠올리면 관통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넘어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달려 나가려고 하는 그 마음이 뭘까. 이타심, 용감함이란 뭘까 자문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어 "용기란 두려움은 존재하지만 어떻게든 넘어서고 싶은 마음, 그 문을 확 열고 나오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마음을 새기다 보니 지난 연말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제게 큰 영감 같은 것을 줬다"고 털어놨다.
송혜교는 '검은 수녀들' 미카엘라 역에 전여빈을 강력히 추천했다고 했다. 전여빈은 "혜교 선배와는 일면식이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최희서라는 공통의 지인이 있다. 미카엘라 수녀 역에 다른 후보들도 있었는데 혜교 선배의 추천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엄청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촬영할 땐 부끄러워서 못 물어봤다"고 말했다.
"'검은 사제들'을 재밌게 봤던 사람이라 스핀오프 형식의 '검은 수녀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대본을 읽는데 같은 포맷이지만 전혀 다른 결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둘만의 힘으로 생명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한 숟갈씩 얹어주는 연대의 과정이 잘 보였습니다. 지금 시대, 한 여성 배우로서 이런 주제를 같이 나누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송혜교에 대해 "우리들의 스타"라며 팬심을 드러낸 전여빈은 "그의 행보를 보며 배우로서 또 다른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혜교 언니는 현장에서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작고 가녀린 몸으로 현장을 큰 나무처럼 버텨주는 분이었어요. 때때로 그 서정적인 눈을 보며 울컥했고, 마음을 온전히 의지하고 기댔죠. 언니가 현장에서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나도 저런 선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전여빈은 오컬트 장르를 무서워한다고. 혼자서는 절대로 못 볼 정도지만 '검은 수녀들'은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겁을 먹는 제 마음이 미카엘라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며 "악령에 깃든 희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던가, 유니아와 희준의 기싸움을 바라보는 미카엘라의 리액션에서 오컬트를 무서워하는 제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의상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큰 장치다. 전여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녀복을 막상 입어보니 정돈된 것 같은 편안함이 들었다. 몸에 어떤 거슬림도 없는 복장이었다"며 "미카엘라는 처음 보면 딱딱하고, 자신을 가둬둔 사람처럼 보이지만 큰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의상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라틴어 기도문에 대해서도 "랩을 외우듯 툭 치면 나올 수 있게 달달 외웠다"며 "송혜교와 문우진의 연기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잘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송혜교와 문우진의 구마 연기를 넋을 놓고 봤다. 그러다 제 연기를 자꾸 까먹었다. 주의해서 함께 구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갔다. 영화에선 기싸움이 느껴졌지만, 현장은 훈훈했고, 마음을 더하는 양보하는 현장이었다"고 떠올렸다.
'검은 수녀들' 마지막 부분에는 '검은 사제들' 최부제로 분한 강동원이 깜짝 등장한다. "'검은 사제들'과 '검은 수녀들' 세계관이 통합되는 기대감을 주기 좋은 장면인 것 같아요. 강동원 선배의 사제복핏은 완벽했죠. 주변에 꽃이 날리고, 선배 주변에만 조명을 켰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이 즐거운, 행복한 촬영이었습니다. 최부제와 미카엘라가 페어가 되는 건, '검은 수녀들'이 이제 막 개봉해서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여빈은 촬영 중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훈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연기라는 예술을 배워가는 입장"이라며 "연기는 저를 사용해 만들어 내는 허상, 허구의 것인데 이걸 어떻게 진짜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소신을 전했다.
화술 학원이라도 다니냐는 질문에 전여빈은 "배우 생활하며 많이 늘었다"고 말하며 꺄르르 웃었다. "세상에 한 작품을 내보인다는 건 많은 분의 수고와 노력, 자본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그들의 노력을 대변하는 얼굴이 되다 보니 책임감을 느끼게 됐고, 조금이라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고민합니다. 그런 긴장되는 순간이 배우로서 오히려 힘이 되더라고요. 고도로 긴장하면, 엄청난 이완이 오면서 배우이자 역할로 밀착되는 순간이 오죠. 100번을 시도할 때 2~3번 정도 찾아오는 데 그 쾌감을 느끼며 긴장한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는 현재 남궁민과 함께 드라마 '우리 영화'를 촬영 중이다. "'하얼빈' 때 무대인사에 많이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다이어트 잠시 뒤로하고 이제 미카엘라로 열심히 다닐 예정입니다. 소통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관객의 시간과 비용이 헛되지 않게 돌아가는 길에 꼭 하나를 안고 갈 수 있게 좋은 연기와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