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성 핵상마비(PSP) 질환 치료 분야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데이터가 공개되자 해외 연구진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글로벌 임상시험으로 확대되면 참여하고 싶다는 반응도 많았습니다.”
이지영 서울대병원운영 서울시보라매병원 신경과 교수(사진)는 16일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달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파킨슨병 운동장애학회(AOPMC) 심포지엄에서 국내 바이오기업 젬백스앤카엘의 신약 후보물질 ‘GV1001’ 임상 2a상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동안 진행성 퇴행성 신경계 질환인 PSP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신약 임상시험을 통해 뚜렷하게 약효를 확인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AOPMC에 참석한 많은 전문가가 신약 개발 가능성 정도만 확인한 초기 임상시험 결과 발표에도 큰 관심을 보인 배경이다. 이 교수는 “아시아 등으로 임상시험을 확대할 계획이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다”며 “다만 임상 3상 시험은 상당한 비용이 드는 절차이기 때문에 진입 여부 등은 아직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보라매병원은 지난 2월 퇴행성, 희소난치성 신경계 질환자를 위한 전문기관인 ‘파킨슨희귀질환센터’를 열었다. 이 교수가 센터장을 맡았다. 환자들을 위한 다양한 치료 접근법 개발 등으로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 교수를 통해 센터 개설 의미 등에 대해 들어봤다.
▷새 센터가 출범했다.
“계획은 이전부터 세웠다. 당초 지난해 12월 출범할 계획이었는데 의정 갈등 등의 여파로 잠시 보류했다가 올해 2월 문을 열게 됐다.”
▷어떤 센터로 만드는 게 목표인가.
“파킨슨병 등 희소난치성 신경퇴행성 질환 연구와 치료 허브 역할을 수행하는 게 목표다. 운동·인지장애가 있는 퇴행성 뇌질환 환자에게 체계적인 치료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연구 분야에서 구체화된 게 있는가.
“파킨슨병 등 관련 희소질환 환자들에게 최적화된 치료 프로토콜을 제공하기 위해 최신 임상시험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국내외 다기관 협력을 통해 희소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법 개발 속도도 높여갈 계획이다. 여러 연구진과 협업해 질환 진행을 늦추고 증상을 완화할 혁신 치료법 개발에 매진할 예정이다.”
▷앞서 GV1001 연구를 통해 다기관 연구 성과를 냈다.
“임상 2a상에 성공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였다. 준비를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시험계획(IND) 승인을 받고 임상시험을 시작하게 된 뒤엔 상당히 이른 시간 안에 등록부터 투약까지 마무리했다. 그동안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의료진도 한국 첫 임상시험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상당히 공을 들였다.”
▷임상 의미를 설명해 달라.
“미국과 유럽 등에서 PSP를 대상으로 한 신약 임상시험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위약 대조군과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인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진행한 임상시험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확인했다.”
▷신약 개발 가능성을 확인했다.
“진행성 핵상마비 환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리처드슨 증후군 유형을 통해 GV1001 저용량 투약군(0.56㎎)에서 질병 조절 효과 가능성을 확인했다. 저용량 투여군은 6개월 뒤 진행성 핵상마비 등급 척도 점수가 0.82점 줄었지만 위약군은 5.19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P값=0.0446). 투약군의 질병 진행 속도를 늦췄다는 의미다.”
▷고령화와 함께 퇴행성 신경계 질환이 늘고 있다.
“병리학적으로 뇌세포가 죽어가는 질환이다. 퇴행성 신경계 질환 그룹에 속하는 질환만 수십 가지에 이른다. 질환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병리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 퇴행성 신경계 질환으로 알츠하이머병이 있다. 파킨슨병과 루게릭병도 상당히 많이 알려졌다.”
▷PSP는 질환을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
“PSP가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진행 속도다. 파킨슨병이 15~20년 정도 진행하는 병이라면 PSP는 5~10년가량 급격히 진행한다. 임상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보면 속도가 세 배가량 빠르다. 또한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개발이 활발한 데 반해 PSP는 질병 진행이 빠르고 다른 질환보다 환자가 적다 보니 신약 개발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환자 증상도 상당히 다양하게 시작하기 때문에 진단 역시 쉽지 않다.”
▷PSP 신약 개발에 참여한 연구진으로서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의정 갈등이라는 한국의 어려운 의료 환경에서 희소난치성 질환 치료제 임상시험에 성공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모든 의료진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두 단계 임상시험에 성공한다고 무조건 신약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임상 경험이 쌓여야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시야로 임상시험을 바라보는 풍토가 조성되면 좋겠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