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라흐 헤스트’ 리뷰
오는 6월 15일까지 예스24 스테이지
변동림이 고심 끝 김환기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에게 바란 건 딱 한 가지, 그의 아호였다. ‘고향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김환기의 아호는 그렇게 동림의 이름이 된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지난달 25일 개막한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시인 이상과 서양화가 김환기 아내인 김향안(1916~2004, 본명 변동림)의 삶에 주목한다. 이 공연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예술은 남다’라는 뜻으로, 김향안이 남긴 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따왔다.
김향안의 인생이 두 가지 시간 축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천재 시인’ 이상(1910~1937)과 만나고 사별했던 ‘동림’의 삶은 순차적인 시간 흐름으로 나아가고, 김환기(1913~1974) 화백과 만나 여생을 함께한 ‘향안’의 삶은 시간의 역순으로 거슬러 펼쳐진다. 두 시간을 대비시켜, 사랑과 예술이 그의 인생에서 어떻게 엮이고 풀려나갔는지를 표현한다.이 공연에서 드러나는 김향안은 사랑에 용감한 ‘모던 걸’이다. ‘책벌레’였던 스무 살, 다방 낙랑파라의 단골손님 이상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사랑이 깊어지던 어느 날, 이상은 묻는다.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 이를 프러포즈로 받아들인 김향안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와 그와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이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둘의 불꽃 같은 사랑은 부부로 산 지 넉 달 만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로부터 7년 뒤 김향안은 김환기와 결혼식을 올린다. 알려진 대로, 당시 김환기는 이혼 경험이 있고 딸 셋을 둔 남자였기에 김향안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김향안은 이름까지 바꾸며 사랑을 선택한다.
두 천재 예술가의 든든한 격려자였던 모습도 생생히 그려진다. 극 중 이상은 말한다. “참 이상해, 사람들은 내 말줄임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림은 알아주니 말이야.” 그렇듯 김향안은 그의 작품 속 숨겨진 뜻을 정확히 ‘해독’하는 아내이자 동료 문인이었다.
김환기에게도 믿음직한 뒷배가 돼 주었다. 그가 자기 작품의 위치가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해하자 “파리로 떠나자”며 “당신 그림이 어떻게 보일지 모험해 봐야지”라고 말한다. 김환기가 이룬 성취에는 ‘예술적 동반자’ 김향안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공연은 두 예술가의 뮤즈였던 김향안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 주지만, 수필가이자 화가로서 그가 지녔던 면모는 충분히 조명되지 않아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중간휴식 없이 110분간 펼쳐지는 공연은 여운이 깊다. “서정시 한 편의 낭송을 듣고 온 듯하다” 등의 관람평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호평의 배경에는 맞춤옷 입은 듯한 배우들 연기와 유려한 음악이 큰 역할을 한다.
특히 김환기의 푸른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무대 위에서 구현되는 장면은 이 공연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인터파크, 예스24 평점은 둘 다 10점 만점에 9.8점. 오는 6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예스24 스테이지에서 펼쳐진다.(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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