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휴가는 책과 함께 어때요?[박선희 기자의 따끈따끈한 책장]

1 week ago 13

박선희 기자

박선희 기자
내 기억 속 가장 완벽했던 휴가 중 하나는 서해안 3성급 리조트의 알록달록한 워터파크에서 보낸 며칠이었다. 극성수기 만실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수많은 리조트 틈새에서 운 좋게 건졌는데, 막상 가보니 왜 이 성수기에 여기만 이토록 ‘합리적인’ 가격의 방이 남아 있었던 건지 뒤늦게 수긍이 가는 상황이었다. 객실 청소도 안 돼 있었고 체크인 시간은 자꾸 미뤄졌다. 그래도 거기서 보낸 며칠은 정말 좋았다. 그 작은 워터파크 비치베드에 누워서 내도록 보르헤스를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르헤스 책은 절판 상태였다. 휴가 전에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많이 뒤졌다. 문인들 모임에서 보르헤스 찬양을 엿들은 뒤였다.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다들 한목소리로 극찬하나 궁금했다. 어렵게 절판 책을 구했는데 배송에도 시간이 한참 걸려 애를 태웠다. 여름휴가를 떠나기 직전, 극적으로 갱지 박스에 담긴 낡은 전집 5권이 묶여 배송됐다. 기뻤다. 완벽한 여름휴가를 위한 모든 채비를 마침내 마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체크인을 했을 때야 잘못된 리조트를 선택했단 걸 깨달은 것처럼, 책을 펼치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보르헤스는 휴가지에서 느긋하게 읽다 말다 할 수 있는 작가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다른 책을 골랐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내겐 너무 난해했다.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져서 읽는 즉시 골아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아직도 내가 읽은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꿈인지 책 내용인지 정확하지 않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이 낮잠하고 섞인 바람에 정말 환상 그 자체가 됐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그 책은 ‘다른 의미’로 휴가지에 적합했다. 휴가가 진정한 쉼과 멈춤을 위한 거라면, 보르헤스는 책장을 펼칠 때마다 내게 완벽한 쉼을 선물했다. 가슴팍에 책을 올려두고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변할 때까지 곤히 잠들어 있던 늦은 오후. 깨어나는 순간조차 마치 하루 종일 책을 읽은 것만 같은 착각에 숙면 효과까지 더해져 더없이 개운하고 뿌듯했던 그 며칠을 끝내고 다시 북적이는 도심으로 나왔을 때, 나는 어떤 의미에서 회복돼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원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일상에서 쌓인 모든 피로와 독소를 단잠 덕에 다 푼 ‘완벽한 힐링 휴가’를 보낸 뒤 다시금 깨닫게 됐다. 책은 모험과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 뒤 회복과 배움, 보람을 얹어 되돌려 놓는 책무를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 심지어 독자가 그걸 베고 졸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어떤 휴가지는 그때 읽었던 책과 함께 기억된다. 발리에서의 모옌, 두브로브니크에서의 김영하, 강화도에서의 아모스 오즈. 하지만 또한 책이 있으면 그곳이 그 어디이건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어지기도 한다. 서해안 저렴한 리조트에서 보르헤스와 함께 ‘내가 책이자, 책이 곧 내가 되는’ 환상의 세계를 자다 깨다 탐험했던 것처럼. 그 경험이 이국적 여행지가 줬던 낯선 두근거림만큼이나 오래도록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휴가철이 돌아왔다. 이 소중한 휴가를 같은 돈 쓰며 훨씬 값지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각자 삶의 테마에 맞는 책을 얹는 것이다. 그것이 모험, 탐구, 쉼, 회복, 도피 그 무엇이든 적절한 책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짭짜래한 바닷바람.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따끈한 모래 알갱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하늘. 책을 펼치면, 우리는 벌써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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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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