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람들은 왜 남의 사업에 턱턱 투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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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심리] 투자금 사적 유용 않고 배당 확실히 줄 거라는 믿음 덕

이숙명 작가의 에세이 ‘발리에서 생긴 일’을 읽다가 재밌는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이 작가는 발리에서 7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 발리에 함께 사는 친구 중 유럽인이 많은데, 그들의 투자 형태가 놀랍다는 얘기였다.

친구인 유럽인들은 발리에서 사업을 한다. 자기 돈은 일부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사업을 시작한다. 가족이나 친구, 지인이 발리에 놀러왔다가 사업 설명을 듣고 수천만 원씩 투자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돈을 모아 사업에 나서는 것이다. 한국인은 아무리 알고 지내던 사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1000만 원 넘게 투자하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구구절절 설명 없어도 사업자 신뢰해

투자금을 받아 사업하는 유럽인은 정해진 배당금을 반드시 지급한다. 원금을 언제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면 그 약속도 철저히 지킨다. 이런 신용을 바탕으로 사업자는 더 큰돈을 투자받아 사업을 늘려간다. 이 작가는 주식회사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이렇게 투자하고 사업하는 게 일상적인 일인가라며 신기해했다.

어딘가에 수천만 원 돈을 투자한다는 건 투자자 입장에서 쉬운 결정은 아니다. 우선 사업자가 투자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만 사용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업에서 이익이 발생하면 자기 지분만큼 확실히 배당을 줄 거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사업이 망하지 않는 한 투자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도 있어야 한다. 이 작가가 본 유럽인들은 사업자가 구구절절 자기를 믿어달라고 설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몇 년 전 일이다. 국내 한 스타트업이 투자 설명회를 준비 중이었고, 해당 담당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 스타트업에는 최소 20억 원 투자가 가능한 예비 투자자가 있었다. 투자자를 설득해 투자를 받기만 하면 몇 년간 아무 걱정 없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담당자는 투자금을 받아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을 어떻게 잘 만들지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상품 개발이나 사업 성공이 아니었다. 투자금을 받으면 앞으로 몇 년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당시 스타트업 구성원은 2명이었고, 투자금을 받아 인력을 더 채용한다 해도 4명 수준이다. 그러면 1년에 4억 원씩 써도 20억 원으로 5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법인카드를 쓰고 한 달에 몇백만 원씩 월급을 챙기면 5년은 아무 걱정 없다. 돈을 아껴 쓴다면 7~8년가량을 사장 노릇하며 잘살 수도 있다.

투자 설명회의 주요 목적도 투자금을 받아 제품을 개발하고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5년 넘게 생활의 안정을 얻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투자금을 받고 제품을 개발하지 못해도 별 상관없었다. 투자금으로 몇 년 잘살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투자자는 사업에 자금을 대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사업자를 먹여 살릴 호구였다.

서구 사회에서는 사업자와 투자자 간 신뢰 관계가 두텁다. GETTYIMAGES

서구 사회에서는 사업자와 투자자 간 신뢰 관계가 두텁다. GETTYIMAGES

한국서 투자금 회수? 상장 때 주식으로

그 담당자가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나쁜 사람이었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완전히 예외적인 경우고, 투자받으려는 사업자는 대부분 공정하고 열정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투자금을 받아 회사 일에만 쓰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노는 데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돈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품목에 투자금을 주저 없이 쓴다. 투자금을 ‘공돈’으로 생각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용한다. 이러면 투자자가 돈을 맡기기 어렵다. 아예 이 사실을 모르면 맡길 수 있어도, 최소한 이런 지출 행태를 예상한다면 돈을 내줄 수 없다.

투자금을 개인 자금으로 사용하지 않고 사업 용도로만 쓰는 공정한 사업자라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오직 사업을 위해서만 돈을 쓰기는 하는데, 투자자에게 지분만큼 배당할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해 훌륭한 사업자에게 투자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업자는 자기 사업에 진심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말 열심이었다. 투자 제안을 하면서 그 사업이 얼마나 유망한지, 회사가 얼마나 커나갈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지금 투자하면 그 투자금이 사업 발전에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지도 강조했다. 그건 분명히 느껴졌다. 투자금을 사업에만 사용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투자금이 회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건 알겠는데, 언제 투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또 언제부터 얼마나 배당을 받을 수 있는지가 없었다. 이 사업자는 사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면서도 투자 이익 배당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직접 물었다.

“투자금은 언제 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회사가 잘 돼서 상장되면 지분을 비싸게 팔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돈을 벌어 이익을 나눠 주겠다는 게 아니라, 상장 시 지분을 팔아서 알아서 이익을 챙겨 가라는 얘기였다.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잘 알겠는데, 투자자들에게 회사 이익을 나눠 주겠다는 발상은 전혀 없었다. 이 경우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회사가 상장돼야만 투자 이익을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기업에 돈을 넘겨준 셈이 된다.

개인사업자만 이렇게 이익 배분에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상장기업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상장기업들은 이익 배당률이 적기로 유명하다. 돈을 벌어도 주주들에게 잘 배당하지 않는다. 지난 정부에서 ‘증시 밸류업’을 외치며 기업들에 배당을 늘리라고 강조하긴 했지만, 막상 이익의 상당 부분을 배당금으로 지급하려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배당을 지금보다 조금 늘리라는 것일 뿐, 정말로 이익 대부분을 배당으로 주는 건 부정적으로 본다. 상장기업도 이러니 일반 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발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유럽인들이 투자 이익을 꼬박꼬박 배당한다는 건 한국인 입장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자본주의 대전제, 투자자에 대한 도덕성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사업 아이템이 좋아야 할까. 사업자의 사업 능력이 출중해야 할까. 물론 그런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은 사업자가 투자금을 받으면 다른 데 쓰지 않고 사업에만 사용할 거라는 믿음이다. 특히 사익을 위해 투자금을 유용하지 않고 사업에 꼭 필요한 사항에만 지출할 거라는 믿음, 그리고 이익이 나면 그 이익을 정당하게 배분할 거라는 신뢰다. 이런 믿음은 단순히 사업자가 이익을 잘 배당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철저히 쓴다고 해서 생기는 건 아니다.

사업자가 정당하게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이익을 최대한 줄여서 배당을 적게 줄 수도 있고, 사업 확장에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배당을 안 할 수도 있다. 사실 이익이 생겼을 때 제대로 배당하는 것에 대해 사업자 스스로 “이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투자자와 투자금을 굉장히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깊은 도덕성을 가져야 하는 일이다. 이런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야 진정한 자본주의다. 이런 도덕성 없이 투자자로부터 돈을 끌어내 마음대로 쓰는 데만 초점을 둔다면 천민자본주의, 자본주의의 탈을 쓴 사기 약탈극이 된다.

한국에서 다른 사람의 사업에 투자하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다. 사업 자체와 사업자에 대한 신뢰가 적어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쉽게 상대를 믿고, 투자하고, 배당이 이뤄지는 서구 사회의 신뢰 시스템이 부러운 이유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87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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