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소소칼럼]

1 month ago 3

지난달 29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9월 말 보통 가을철임에도 피서객들로 붐비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9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9월 말 보통 가을철임에도 피서객들로 붐비고 있다. 뉴스1

지난 주말 이불을 바꿨다. 이불 바꿔라, 철철이 공기가 바뀌는가 싶으면 계절보다도 먼저 찾아오는 엄마의 레퍼토리. ‘아직 괜찮다’며 두세 번 잔소리가 되고야 움직이곤 했는데 올해는 냉큼 바꿨다. 새하얀 냉감 소재 여름 이불을 못 해도 석 달은 쓴 것 같다. 중간에 한 번 빨았어도 누레지려던 차다. 베이지색 차렵이불에 살을 부비니 포근하면서도 찹찹하다. 여름이었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환경 기사를 담당하면서 가장 많이 쓴 기사는 아마도 이상 기후였을 것이다. 기사의 생리가 그렇지만 봄이 봄답고 가을이 가을다우면 기사가 안 된다. 그렇게 날씨 기사를 ‘써댈 수’ 있었던 건 지구가 가장 뜨거웠다던 지난해, 때가 때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엔 때 이른 여름이라고 12월엔 때늦은 여름이라고 썼다. 일 년 내내 ‘여름이었다.’

SNS에서 ‘여름이었다’ 밈이 유행한 것도 벌써 2, 3년쯤 됐나. 보기는 많이 봤지만 정확한 유래는 몰랐는데 찾아보니 이렇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학교에 시를 창작해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없다”는 고민에 다른 사용자가 “개소리 써놓고 끝에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그럴싸해진다”는 조언을 하면서다. 어느 계절인들 붙이면 안 그렇겠냐만- 정말 그다지 맥락 없는 말들도 그럴듯하게 읽히는 걸 보면 여름이 꽤 서정적인 계절인 건 맞나 보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화성 창룡문 인근에서 시민들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다. 뉴스1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화성 창룡문 인근에서 시민들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다. 뉴스1

얼마 전 오랜만에 홍대 앞을 걸었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데이트도 친구들 약속도 다 이 근처였는데 어쩐 일인지 오지 않게 된 지 한참 됐다. 나는 오랜만이어도 홍대 공식 만남의 장소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붐볐다. 지금의 나는 영 입지 못할 것 같은 옷차림들까지. 해는 밝고 사람들은 북적이는데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친구는 성수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단다. 업무차 식사 자리가 있던 금요일 저녁, 유튜브에서나 봤던 세상 힙한 청년들 사이를 정장 차림으로 가로지르려니 조금 부끄러웠다고. 우리도 그렇게 쏘다니며 놀던 때가 있었는데.

“여름이었다…☆”

친구와 10년도 더 전 그 시절을 떠올리다 이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 그런데 걔네도 취준생 되면 정장 입은 널 부러워할걸.” “맞아 그땐 사원증도 부러웠지…. 끔찍ㅋㅋㅋ”

그랬다. 홍대 앞 맛집을 찾아다니며 웃었던 만큼 그 앞 도서관과 스터디카페에서 울던 날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계절도 적절한 때 과거형이 되어야 추억도 할 수 있다. 그 여름이 끝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훅 쌀쌀해진다고 한다. 긴 더위를 마치는 비라니 ‘호우시절(好雨時節·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아, 조금 어폐가 있구나. 내년엔 조금 더 때맞춰 오는 비이길.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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