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이불을 바꿨다. 이불 바꿔라, 철철이 공기가 바뀌는가 싶으면 계절보다도 먼저 찾아오는 엄마의 레퍼토리. ‘아직 괜찮다’며 두세 번 잔소리가 되고야 움직이곤 했는데 올해는 냉큼 바꿨다. 새하얀 냉감 소재 여름 이불을 못 해도 석 달은 쓴 것 같다. 중간에 한 번 빨았어도 누레지려던 차다. 베이지색 차렵이불에 살을 부비니 포근하면서도 찹찹하다. 여름이었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환경 기사를 담당하면서 가장 많이 쓴 기사는 아마도 이상 기후였을 것이다. 기사의 생리가 그렇지만 봄이 봄답고 가을이 가을다우면 기사가 안 된다. 그렇게 날씨 기사를 ‘써댈 수’ 있었던 건 지구가 가장 뜨거웠다던 지난해, 때가 때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엔 때 이른 여름이라고 12월엔 때늦은 여름이라고 썼다. 일 년 내내 ‘여름이었다.’
SNS에서 ‘여름이었다’ 밈이 유행한 것도 벌써 2, 3년쯤 됐나. 보기는 많이 봤지만 정확한 유래는 몰랐는데 찾아보니 이렇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학교에 시를 창작해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없다”는 고민에 다른 사용자가 “개소리 써놓고 끝에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그럴싸해진다”는 조언을 하면서다. 어느 계절인들 붙이면 안 그렇겠냐만- 정말 그다지 맥락 없는 말들도 그럴듯하게 읽히는 걸 보면 여름이 꽤 서정적인 계절인 건 맞나 보다.
얼마 전 오랜만에 홍대 앞을 걸었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데이트도 친구들 약속도 다 이 근처였는데 어쩐 일인지 오지 않게 된 지 한참 됐다. 나는 오랜만이어도 홍대 공식 만남의 장소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붐볐다. 지금의 나는 영 입지 못할 것 같은 옷차림들까지. 해는 밝고 사람들은 북적이는데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친구는 성수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단다. 업무차 식사 자리가 있던 금요일 저녁, 유튜브에서나 봤던 세상 힙한 청년들 사이를 정장 차림으로 가로지르려니 조금 부끄러웠다고. 우리도 그렇게 쏘다니며 놀던 때가 있었는데.
“여름이었다…☆”
친구와 10년도 더 전 그 시절을 떠올리다 이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 그런데 걔네도 취준생 되면 정장 입은 널 부러워할걸.” “맞아 그땐 사원증도 부러웠지…. 끔찍ㅋㅋㅋ”
그랬다. 홍대 앞 맛집을 찾아다니며 웃었던 만큼 그 앞 도서관과 스터디카페에서 울던 날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계절도 적절한 때 과거형이 되어야 추억도 할 수 있다. 그 여름이 끝나지 않았더라면.오늘은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훅 쌀쌀해진다고 한다. 긴 더위를 마치는 비라니 ‘호우시절(好雨時節·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아, 조금 어폐가 있구나. 내년엔 조금 더 때맞춰 오는 비이길.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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