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봄이 익었나 봄[여행스케치]

18 hours ago 2
지난달 초 버스를 타고 전북 순창군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뿌옜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여기까지 미치나 보다, 했다. 다만 대도시에서 보는 미세먼지 잔뜩 찬 대기와 달리 어딘가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이튿날 눈을 떠 언덕에 자리한 숙소 밖으로 나가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온의 수분이 피부로 조금씩 느껴지는 먼지 무리가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전북 14개 시군 가운데 최남단인 이곳 순창도 환경오염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나 했는데… 아니었다. 안개였다.

순창은 연중 안개 낀 날이 77일에 이르는 안개도시다. 바다와는 거리가 멀어도 눈비가 많다. 10∼11월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 자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소설가 김승옥에게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는 입김과’ 같아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하지만 순창에서 안개는 녹진하게 봄을 익히고 있었다. 아니, 봄이 안개 속에서 익고 있었다.

전북 순창군 강천산 군립공원 메타세쿼이아 길. 파란 하늘 아래로 나무의 푸름이 더해졌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푸르고, 그 그림자들도 푸르다. 신록이다.

전북 순창군 강천산 군립공원 메타세쿼이아 길. 파란 하늘 아래로 나무의 푸름이 더해졌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푸르고, 그 그림자들도 푸르다. 신록이다.
● 신록 무르익다

지난달 말 순창을 다시 찾았다.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강천산(剛泉山)으로 향했다. 약 4주 전 왔을 때는 산어귀까지 이어지는 계곡 주변 개나리와 진달래가 잠시 피어 있을 뿐, 새순이 막 돋아나려 땅에서, 나무에서 용틀임할 때여서인지 높다란 메타세쿼이아들도 나목(裸木)에 가까웠다.

강천산 길에서 만난 다람쥐. 사람을 피하다니 무슨 말씀.

강천산 길에서 만난 다람쥐. 사람을 피하다니 무슨 말씀.
그러나 ‘고작’ 20여 일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강천산 군립공원(강천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군·郡에서 지정하고 관리하는 공원이다) 매표소에서 50여 m 걸었을까. ‘터널’이 시작됐다. 푸름의 터널이다. 나무도, 바위도, 계곡물 위로 얼굴을 살짝 드러낸 돌들도 푸르다. 저 높은 데서 활짝 기지개를 핀 활엽수 잎들 틈바구니로 하늘의 파랑이 언뜻언뜻하다. 터널을 거니는 사람들도 푸르고, 그들의 그림자도 푸르다.

푸름의 세례를 받으며 산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크고 작은 폭포를 만난다. 병풍폭포 천우폭포 구장군폭포…. 병풍폭포는 병풍같이 펼쳐진 높이 약 25m, 넓이 약 30m 절벽 위에서 쏟아져 내린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떨어져 바위에 튀기는 물방울들마저 푸르다.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쏟아지는 힘을 비켜 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황지우, ‘등우량선 1’에서) 마침맞게 폭포 앞에 무지개를 볼 수 있는 벤치가 있다. 몇 분 앉아 봤지만 무지개 일곱 색도 푸름에 가렸나 보다.

강천사(剛泉寺)를 지나 1km쯤 완만한 오르막을 걸으면 구장군폭포가 나온다. 병풍폭포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얀 두 물줄기가 30m 아래 짙고도 푸른 호수로 낙하한다. 이 모습을 카메라에 잘 담고 싶은데 의욕만 앞선다. 호수 맞은편 정자에도 올라가 보고, 호숫가 벤치에 드러누워도 보면서 앵글을 이리저리 맞추는데 끝내 셔터만 어지럽게 누르다 무람해진다.

그때 산 중턱 토굴이 보인다. 저기라면 폭포가 한눈에 들어올 것만 같다. 200여 계단을 올라 수좌굴(首座窟)에 이르니 시야가 확 트인다. 이런…, 나뭇잎의 풍성한 푸르름이 수직에 가까운 두 가닥 흰 선을 가린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폭포들이 인공이라는 것. 알아채기 쉽지 않다.

강천산 신록의 터널을 벗어나는 방법은 구름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시야가 트인다.

강천산 신록의 터널을 벗어나는 방법은 구름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시야가 트인다.
푸름의 터널을 잠시 벗어나려면 구름다리에 서 보는 것도 좋다. 구장문폭포에서 온 길을 되짚어 100m쯤 가면 현수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산과 하늘의 푸름을 가로질러 주황 쇠 다리가 30m가량 뻗어 있다. 폭 1m 상판은 봄바람에 혼자 걸어도 약간 출렁인다. 다리 중간에서 보는 경치는 작은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순창 사람들은 이웃한 정읍시가 끼고 있는 내장산이 부럽지 않다. 가을 강천산은 내장산 단풍 뺨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좋다는 소문이 퍼져 타지에서 오는 단풍 관광객이 오히려 야속할 지경이다. 하지만 신록(新祿) 무르익은 강천산이 가을 단풍에 질쏘냐, 싶다.

내려오다 송음교(松蔭橋)를 지난다. 난간 기둥 모양이 새끼줄로 엮은 메주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순창에서 봄에 익는 것이 산만은 아닐 터다.

● 장(醬)이 익다, 술이 익는다

강천산에서 차를 타고 5∼6분 가면 아미산 자락이 나온다. 그곳 36만여 ㎡(약 11만 평) 터에 순창발효테마파크와 순창고추장민속마을이 있다. 순창 하면 고추장이다. 고추장에 순창이 가릴 정도다. 순창군이 2021년 테마파크를 열 때 이름에 고추장이 아닌 발효라는 말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고추장의 고장이 아니라 발효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얘기다.

‘순창고추장’이라는 말은 174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소문사설(謏聞事說)’이라는 책에 ‘淳昌苦草醬造法(순창고초장조법)’이라고 처음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순창이 전북 순창을 특정하는 것은 아니고 ‘순창 조 씨’ 가문을 일컫는다는 해석이 있다.(‘조선의 미식가들’, 주영하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조선 시대 영조가 즐겨 먹은 고추장이 순창 조 씨 제법(製法)을 따랐을 확률이 높다는 데서 유추되는 얘기다. 지역 특산물로 순창고추장이 처음 나온 것은 1815년 ‘규합총서(閨閤叢書)’라는 책에서다.(‘한국인의 장(醬)’, 한복려 한복진 지음, 교문사, 2013)

고추장은 먼저 콩을 쑤어 메주를 빚는다. 메주는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둥글납작하게 빚어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을 낸다. 구멍떡 또는 떡메주라고 부른다. 간장 담글 때 쓰는 메주는 콩메주다. 떡메주를 한 달 정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매달아 띄운다. 잘 띄운 메주를 빻은 가루에 멥쌀가루를 6 대 4로 섞고 고춧가루 소금 엿기름 등을 넣어 버무린다. 그렇게 1년 이상 묵혀야(익혀야) 판매할 수 있단다.

순창고추장 식품명인 강순옥 씨가 자신의 장독대에서 익어 가는 고추장을 한 주걱 퍼 보였다.

순창고추장 식품명인 강순옥 씨가 자신의 장독대에서 익어 가는 고추장을 한 주걱 퍼 보였다.

강 씨 가게에서 새끼줄에 묶은 고추장용 떡메주를 띄우고 있다.

강 씨 가게에서 새끼줄에 묶은 고추장용 떡메주를 띄우고 있다.
고추장민속마을에는 고추장 장인들의 가게가 25곳 있다. 이곳 ‘순창장본가’ 식품명인(名人) 강순옥 씨(79) 장독대의 옹기 수백 개에서 고추장이 익어 간다. 하지만 장독 오래됐다고 고추장 맛이 좋은 건 아니라고 한다.

발효테마파크는 고추장을 비롯한 우리나라 발효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구성물들로 꾸며 놨다. 컴퓨터게임을 비롯한 각종 놀이와 퀴즈, 영상 등으로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순창에서 익는 것이 또한 장만은 아니다.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12월 유네스코는 장(醬)담그기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당시 일본 사케(니혼슈·日本酒)도 함께 선정됐는데, 공통점은 바로 발효다. 최근 10여 년 국내 전통주 바람이 거세다. 이름 있는 술도가들이 전국 여기저기서 등장하고 있다. 순창에는 막걸리 브랜드 ‘지란지교’가 있다. 시청 공무원 출신 임숙주 씨(69)가 부인 김수산나 씨(63), 아들 재현 씨와 함께 술을 빚는다. 임 씨 이름 ‘숙’은 ‘익을 熟’이고 ‘주’는 ‘술 酒’란다. 운명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00일간 발효시키는 전통적인 순창 백일주 방식을 고수하고, 젊은 아들은 캐모마일로 탁주를 빚고 무화과로 증류주를 만드는 등 최신 흐름을 접목시킨다.

담뿍 익은 산과 나무와 고추장과 술에 취한 듯, 젖은 듯 약간 굼떠진 발을 강천힐링스파 족욕기에 집어넣는다. 전극과 온천수 그리고 소금을 넣은 물이 발을 삼키자 물 색깔이 차츰 짙어지며 황록색으로 변한다. 발도 익는 것일까. 노곤하면서도 시원하다. 물을 빼자 발에 삶은 옥수수처럼 윤기가 어린다. 번잡하던 머릿속이 잠잠해진다. 순창에서 내 마음이 익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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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순창=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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