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대표할 만한 '세기의 영화감독' 로버트 알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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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알트만(Altman)>(2014) 속 로버트 알트만 감독 / 출처. IMDb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알트만(Altman)>(2014) 속 로버트 알트만 감독 / 출처. IMDb

이 칼럼의 제목 ‘세기의 영화감독’이 말 그대로 ‘세기’를 맞은 감독을 처음으로 모시게 되었다. 바로 1925년 2월 20일에 태어난 로버트 알트만이다. 알트만은 1970년대에 할리우드의 새바람을 불러온 감독 군들의 작품들을 상징하는 ‘뉴 할리우드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플레이어>(1992), <패션쇼>(1994)를 포함한 풍자 코미디(satirical comedy)의 대가였다. 동시에 알트만은 2000년대까지 40여년에 걸쳐 꾸준히 대작을 만들고 관객을 만났던 몇 안 되는 장수 감독이기도 했다. <매쉬>(1970)를 포함해 <고스포드 파크>(2001) 에 이르기까지 작가주의의 건재함과 할리우드의 막강함을 과시할 만한 작품은 모두 알트만의 손에서 탄생했다.

로버트 알트만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나는 알트만 식의 누아르 <롱 굿바이>(1973)를 가장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알트만이 만든 다른 작품들의 위대함을 모두 합쳐도 <롱 굿바이>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롱 굿바이>는 1953년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 ‘The Long Goodbye’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로서는 주인공인 필립 말로우가 등장하는 여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챈들러의 소설들이 대부분 누아르 장르의 황금기인 1940년대에 영화화되었다면 알트만의 <롱 굿바이>는 다소 늦게 도착한 프로젝트로 보이기도 한다. 할리우드의 악명 높은 검열 시스템인 자진제작코드가 사라지고, 10대와 20대가 주 관객층으로 바뀌면서 문학 형식의 고전적인 누아르 영화보다는 높은 수위의 폭력과 새로운 모델의 반영웅을 등장시키는 <프렌치 커넥션>(윌리엄 프리드킨, 1971),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1974) 등과 같은 네오 누아르가 더 시의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롱 굿바이> 이미지 포스터 / 출처. IMDb

영화 <롱 굿바이> 이미지 포스터 / 출처. IMDb

물론 이러한 ‘추정’은 <롱 굿바이>를 보기 전에 떠올렸던 절대적으로 틀린 예상이었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롱 굿바이>는 40년대의 고전 누아르 영화들과도,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한 다른 모든 작품들과도 완전히 다른 알트만식의 풍자극이다. 엄밀히 말해 영화의 누아르‘적’ 플롯과 중심 캐릭터 몇몇을 제외하면 <롱 굿바이>는 원작의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다른 모습과 기운을 가진 작품이다. 예를 들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을 원작의 50년대에서 70년대로 옮겨온다. 창녀와 갱스터가 아닌 히피와 반전 운동가들이 점령한 LA, 그리고 중절모와 여자가 아닌 고양이와 말보로 담배를 가장 사랑하는 필립 말로우 등 영화는 시대적 변화로만도 드라마틱한 변모를 보인다.

영화 <롱 굿바이> 스틸 컷 / 출처. IMDb

영화 <롱 굿바이> 스틸 컷 / 출처. IMDb

무엇보다 알트만은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현재의 미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재료들로 치환한다. 가령 원작에서 필립 말로우와 때때로 도움을 주고받는 형사들은 알트만의 영화에서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 이후로 무너진 공권력과 사회 전반에 팽배한 불신주의를 기표하는 인물들로 변모한다. 영화 속 이들은 거짓말과 폭력을 무작위 대상에게 일삼는 존재들로 말로우를 포함한 그 누구도 경찰의 도움을 바라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경찰의 무능함은 곧 시스템의 무능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부와 사회의 무능함으로 비친다. 알트만은 이러한 사회적 기류를 말로우의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그가 자주 가는 슈퍼마켓의 직원이나 옆집 히피 이웃들이 겪는 상황극을 통해 그려낸다.

알트만의 <롱 굿바이>가 훌륭한 것은 영화 전반에 이러한 비판과 풍자가 넘치고 있음에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챈들러 소설의 어두움과 비장함은 알트만의 영화에서 독특함과 발랄함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러한 뛰어난 ‘환태’는 거장 로버트 알트만의 비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 촬영 시기의 로버트 알트만 감독 / 출처. IMDb

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 촬영 시기의 로버트 알트만 감독 / 출처. IMDb

많은 노장 감독의 후기 작품들, 혹은 유작이 그들의 전성기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실망스러운 완성도를 보여준다면, 알트만의 필모그래피는 놀라울 정도로 지속적인 명작 리스트를 유지했다. 감독의 사망 5년 전에 개봉한 <고스포드 파크>(2001) 그리고 사망 직전에 개봉한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까지 그는 저력과 역량을 잃지 않았다. 과연 그는 세기를 대표할 만한 ‘세기의 영화감독’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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