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5년 만에 무역회사를 창업하고 지금은 1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채수향 씨(36)다.
그의 길지 않은 삶은 시련을 넘고 넘은 도전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굶주렸던 어린 시절을 지난 15세에 집을 강제로 빼앗겼고, 군에 입대해 21세에 노동당원이 됐지만 24세에 탈북 길에 올랐다.
먹고 살기 위해 군인 신분에도 장사를 했고, 제대한 뒤에도 짐꾼 10명을 거느린 처녀 밀수꾼이었고, 한국에서도 세계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그의 일생을 들어보면 ‘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속담이 맨 먼저 생각날 수밖에 없다.
● 굶주렸던 어린 시절
채 씨가 나서 자란 곳은 양강도 혜산시 장안리. 그곳은 지금 사라졌다. 거대한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것이다.1990년 그는 지질탐사대 노동자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전방 5군단에서 군 복무를 한 뒤 ‘방침 제대’ 대상이 돼 혜산으로 차출돼 왔다. 방침 제대란 김 씨 일가의 특별 지시에 따라 만기 제대 군인들을 탄광, 광산, 농장 같은 힘든 생산 현장에 집단 배치하는 제도이다. 강제적인 노동력 배치의 일환이다.혜산에 온 아버지는 양강도 출신 여성과 중매로 결혼해 채 씨를 낳았다. 채 씨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으로 기억돼 있다. 5세 때인 1995년경부터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그의 집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른 봄부터 산나물을 따서 낟알에 버무려 먹었다. 쓰다고 내뱉는 어린 채 씨를 꼭 껴안고 어머니가 “밥이라고 생각 말고 약이라 생각하고 먹어라”라고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산에 올라 화전을 일구는 부모를 도왔고 땔나무도 해 왔다. 그 와중에 7월이면 김일성 사망일에 동상에 놓을 꽃을 꺾느라 산속을 헤맸다.
어느 정도 살던 그의 집은 이때부터 돈 되는 것을 하나하나 팔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재봉틀을 팔고 나서 어머니는 온밤을 울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강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혜산에서 개인 신분으로 금을 제일 먼저 제련한 사람입니다. 탐사대에서 익힌 기술을 활용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어요.”
그가 살던 마을을 지나 좀 더 올라가면 금광이 있었는데, 고난의 행군 때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 거의 가동을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금광석(금돌)에 눈을 돌렸다. 탐사대 출신이라 버력(광산이나 탄광에서 나오는 광물 성분이 섞이지 않은 잡돌)만 봐도 금 함유량을 추정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금과 송이는 김 씨 일가 통치자금으로 간주해 개인이 매매하면 중범죄로 처벌된다. 그렇지만 굶주리는 자식을 보면서 초연할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아버지는 동네에서 마광기(摩鑛機·광석을 잘게 부수는 기계)를 직접 만들어 멀리 떨어진 개울가에 숨겨 놓았다. 마광기로 금돌을 가루로 만든 뒤 수은을 넣고 돌려 사금을 뽑아냈다. 사금을 중국에 몰래 팔기 시작하니 집안 형편이 갑자기 좋아졌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다. 2~3년 후 온 동네가 사금을 뽑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난한 동네를 맡았다고 한탄하던 보위원이나 안전원도 눈을 감아주고 한몫씩 챙겼다.

● 물속에 잠긴 고향 마을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5년 갑자기 동네에 소개(疏開) 명령이 떨어졌다. 삼수발전소 댐 건설을 위해 동네가 수몰지가 됐으니 어느 날짜까지 집을 비우라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옮겨갈 집을 주거나, 집값을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보상 한 푼 받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능력껏 탈출했다. 탈출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집은 뺏었는데, 직장은 계속 다녀야 한다고 강요했다.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려면 또 뇌물이 필요했다.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움막을 쳤다.
채 씨 부모도 어디로 갈지 머리를 맞댔다. 첫 번째 후보지는 부친 고향인 함남 마양도. 동해 최대 잠수함 기지가 있는 섬이다. 산밖에 없는 혜산보단 바닷가에 정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른 도로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일단은 모친 고향 삼지연으로 가서 있다가 마양도로 옮겨 가기로 했다.
다만 곧 학교를 졸업하는 딸은 미리 마양도에 가서 자리 잡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부모는 채 씨를 마양도 셋째 큰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학생은 어른보다 이주가 훨씬 쉬웠다. 마침 그해 채 씨의 두 살 위 언니도 군에 입대해 마양도 해군부대에서 복무하게 됐다.
마양도 아이들은 혜산 산골 아이들보다 공부를 훨씬 잘했다. 학교를 1년 다니니 졸업반이 됐다.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언니처럼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로 발령될 터인데 노동자로 사는 아버지의 가난을 많이 목격했기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군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돌아오면 다른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 여성이 군에 입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여성을 많이 뽑는 해도, 적게 뽑는 해도 있었다. 그는 담임선생과 군사동원부 지도원을 찾아가 뇌물을 주며 군에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뇌물은 통했다.
함흥에서 최종 신체검사를 마치고 입대했다. 어느 부대에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군이나 좋은 부대에 가려면 뇌물이 훨씬 많이 필요했지만 돈이 없었다.

● 여군 연락병이 처음 받은 혁명 과업
2007년 5월, 17세 수향은 초모생(신병 입대자) 300여 명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군복은 육군이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기차는 3일을 달려 동막이라는 역에 섰다. 내리고 나서야 황해북도 신계군이란 것을 알았다.초모생들은 곧바로 신병훈련소인 518훈련소로 갔다. 훈련생들은 남성 2개 중대와 여성 1개 중대로 갈라져 3개월간 훈련소 생활을 시작했다.
518훈련소는 방사포와 장사정포 등으로 구성된 포병 군단 예하였다. 신계읍에서 군사분계선까진 5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전방으로 진출해 포사격을 해야 하는 부대였다.
3개월 뒤, 채 씨는 훈련소 직속 무선대대 무전수로 임명됐다. 무선대대는 군단 본부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무선결속소(무선 통신원과 기재가 있는 곳)에서 무전수 전문 훈련을 다시 받았다. 하루 종일 모스부호 송신기를 두드리는 훈련을 받았는데 정작 무전기는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
3개월쯤 지난 11월경 중대장이 그를 불렀다. 종합훈련장 연락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부대 주둔지에는 포사격을 할 수 있는 대규모 훈련장이 있었는데, 북한군은 12월경부터 3개월 동안 이곳에서 동계 훈련을 했다.
연락병의 공식 임무는 훈련장 포사격 지휘부에서 각 부대 간부 사이 연락을 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위 장교들의 시녀나 다름없었다.
훈련 나온 소장(준장급), 대령급 군관 20여 명이 기상하기 전에 양치질용 소금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식사 준비를 돕고 신발을 닦고, 그들의 발싸개까지 온갖 의복 세탁을 도맡았다.
군관들이 취침하면 연락병은 등잔 아래서 이들의 군복 목달개(흰 칼라)를 다느라 바느질을 해야 했다. 낮에는 낮대로 잡다한 심부름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하루에 기껏 서너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17세 신병을 훈련소 지휘부에 보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지휘부에서 근무하다 보니 북한군 포사격 실력을 알게 됐다. 정확도가 너무 낮아서, 어쩌다 목표에 맞으면 자기들끼리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명중률은 문제도 아니었다. 기동 명령이 떨어져도 포들이 고장 나 제대로 출동시키지도 못했고, 통신이 연결되지 않아 연락병이 열심히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연락병 생활 3개월을 마치니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군의소에서는 눈 결핵과 결막염이 동시에 왔다며 실명하기 전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밤에 눈을 혹사한 결과였다. 입대 6개월 만에 입원해 3개월을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고난의 시작인 줄 전혀 몰랐다. 제대할 때까지 6년 동안 그는 많은 부대를 옮겨 다녀야 했다.

● 덕천탄광에서 만난 한국 쌀
2008년 5월 군의소를 퇴원해 무선대대에 복귀한 지 3일 만에 중대장이 불렀다. 부대가 동원된 예성강발전소 건설 지휘부로 가라는 것이었다. 종합훈련장 시절 성실하게 수발을 들었더니 군 간부들이 만족해서 다시 요구한 것이다. 하는 일은 똑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관숫자가 적어 일의 강도가 줄었다는 것이다.예성강발전소 건설 과제가 마무리된 그해 11월까지 연락병으로 지내다가 자대 복귀하니, 다시 덕천탄광으로 가라고 했다. 평양에 전기를 공급하는 북창화력발전소가 제대로 가동을 못 해 실태를 파악한 결과 덕천탄광에서 석탄을 잘 공급하지 못한다는 보고가 김정일에게 올라갔다.
전군에서 군인을 차출해 덕천탄광에 보내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고 채 씨 군단에서도 두 개 대대가 차출됐다. 그는 탄광 지휘부 상무조라는 지휘소에서 연락병 임무를 맡았다. 남성 군인들은 깊은 갱에 들어가 원시적 도구로 석탄을 캐야 했는데, 갱이 무너져 죽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때가 그나마 연락병 생활 중에선 제일 잘 먹을 때였다. 덕천탄광이 중요했던지 김정일 지시로 각종 공급 물자들이 우선적으로 보급됐다. 가끔 유엔이 지원했다는 육류나 약도 들어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쌀이었는데, 한국에서 지원한 쌀이었다. 북한 쌀로 밥을 하면 몇 번씩 돌을 씹어야 했는데, 한국 쌀엔 돌이 전혀 없었다. 지휘관들은 밥을 먹으면서 “유엔 쌀이 정말 좋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남조선 쌀이라고 할 순 없으니 유엔 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안전했다.
이때부터 채 씨는 취사도 담당했다. 사회에서 차출한 여성 요리사가 있었는데, 군관들이 채 씨가 만든 요리보다 맛이 없다며 내쫓았다. 오전 5~6시부터 식사 준비를 했는데,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쌀을 적당히 빼돌려 다른 필요한 물품과 바꿀 수도 있었다.
2009년 4월 덕천탄광 파견이 끝났다. 입대해 2년 동안 간부 심부름만 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뭔가 안정적인 곳에 자리 잡아야 노동당에 입당도 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도 될 것 같았다. 모든 여성 병사가 그렇듯 그도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군단 간호사 학교는 3년에 한 번 신입생을 뽑아 6개월 교육을 시키는데, 마침 그해에 신규 입학생 모집이 있었다.
간호사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고위 간부 자제라면 어떤 연줄을 타고서든 학교로 가는데, ‘빽’이 없는 채 씨는 밀어줄 사람도, 뇌물 줄 돈도 없었다.
그나마 2년간 연락병으로 있으며 군 고위 간부들과 안면이 생긴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중장이자 군단 ‘넘버 2’ 정치위원에게 간호사 학교에 추천을 해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군단 정치위원의 전화 한 통으로 입학이 결정됐다.

● 군 간호사 꿈을 이루다
그해 간호사 학교엔 모두 40명이 입학해 2009년 11월 졸업했지만 채 씨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간호사 학교 졸업생 지망 1순위는 군단 지휘부 간부들을 치료하는 군단 직속 참모진료소였는다. 그러나 정원이 군의관 1명에 간호사 네댓 명뿐이라 자리가 나지 않았다. 부모 ‘빽’으로 들어온 학생을 ‘부탁자’라고 하는데, 가장 힘이 있는 부탁자 한 명 정도에만 차례지는 자리였다.
지망 2순위는 군단급 병원 ‘호병원’이었다. 북한군은 군단급 병원에 숫자를 붙였는데, 그의 군단 병원은 95호 병원이었다. 여기도 자리가 잘 나지 않았다. 자리가 나도 부탁자들이 우선적으로 갔다.
3순위는 여단 병원이고 마지막 4순위는 중대 위생지도원이었다. 남성 중대는 남성 병사가 위생지도원을 맡았다. 여성 중대는 많지 않았기에 채 씨가 졸업할 당시엔 중대 위생지도원 자리조차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채 씨는 여단 후방부 여성 경비분대에서 일반 병사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2010년 2월 경비분대 부분대장이 됐다. 이쯤 되니 굳이 간호사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방부 경비부대여서 물자에 접근하기도 용이했다.
더 좋았던 것은 여단 후방부에 간호 자격을 가진 병사가 없어서 군관 가족들은 주사를 놔 달라고 그를 불렀다는 점이다. 군 병원에도 약이 없어 군관 가족들은 장마당에서 약을 구입했는데, 주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군관 부인들이 남편에게 부탁하면 입당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해 5월 12일에 김정일 방침이 하달됐는데, 군부대 경비는 사회에서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 여파가 그때까지 이어져 병력 자원이 급감하던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대책이었다.
방침에 따라 졸지에 채 씨의 경비분대는 해산되고 여성 고사포 중대에 배속됐다. 채 씨는 간호사 자격이 있었기에 고사포 중대 위생지도원이 될 수 있었다.
북한에서 고사포 중대 여군은 가장 힘 없는 집안 자식들이 간다.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켜지지 않는 환경이었다. 힘은 들었어도 그나마 조건이 좀 나은 곳에서 그동안 복무했던 채 씨에게 고사포 중대 상황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피부 좋고 피복 좋은’ 경비분대 전입생들은 온 중대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중대를 벗어나기 위해 채 씨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반년 만에 그는 여단 군의소 내과 부간호장이 제대한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다. 군단 지휘관들과의 인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간호사로서의 실력을 쌓을 새도 없이 불쑥 부간호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다. 몇 달 동안 이를 악물고 외우고 연습하고를 반복해 마침내 부하들의 인정을 받게 됐다.
여단에서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선 군의소에 약이 없었다. 제일 많은 환자는 결핵환자였는데, 결핵약은 유엔에서 들여왔다는 이소(아니아지드) 한 가지밖에 없었다. 유엔에서 보낸 다른 약이 몇 종류 더 있긴 했지만, 과장 이하는 유엔 약 처방 권한이 없었다.
집안이 잘사는 병사들은 집에서 부쳐 온 돈으로 장마당에서 약을 사서 치료했다. 장마당에 가면 각종 귀한 약이 다 있었다. 포도당만 봐도 장마당에서 한국제 파우치 포도당이 제일 비쌌고 그다음으로 독일제 포도당, 그리고 유리병에 든 중국제 포도당도 있었다.
돈이 없으면 군단에서 자체 제조했다는 포도당을 맞아야 했는데, 정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병 안에 부유물이 떠다녔다. 그마저도 급한 환자에게만 처방됐다.
병은 민간에서 각종 병을 거둬들여 씻은 것이라 모양이나 색상이 제각각이었다. 진한 색깔 병이면 병사들은 얼마나 더러운 링거를 맞는지도 몰랐다. 같은 병실에서 링거를 맞는 모습만 봐도 병사들 집안 수준이 다 파악됐는데, 한국산 파우치 포도당을 맞으면 매우 잘사는 집 아들이 분명했다.
● 장사에 뛰어든 여군 간호사
채 씨는 여단 군의소에서 2013년 4월 제대될 때까지 근무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고생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 추운 겨울, 간호사들에게까지 야간 경계근무를 서게 해 동상을 입었다. 김정은이 지도자가 되고 위대성 교양 사업이 시작됐다. 충성의 노래라며 외우게 하는 노래가 많아졌다.새로 올라선 젊은 지도자는 7세에 출전한 보트 경기에서 세계 최고 수준 외국 조종사를 이겼다고 했고 말도 잘 타고 운전도 잘했다고 선전했다. 7세에 보트나 경주용 차를 운전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토를 달 수도 없어 그러려니 했다.
그즈음 그의 관심사는 온통 돈벌이에 가 있었다. 우선 군의소 안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다음으론 입당하기 위해 뇌물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단 군의소는 군의관 몇 명과 간호사 11, 12명으로 구성됐는데, 간호사라 해도 알고 보면 부모들이 꽤 높은 간부였다. 이들은 외출할 때 장마당에서 파는 비싼 사복을 입고, ‘매직 약’으로 머리를 펴며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북한군 피복으로 공급되는 차마 입기 힘든 속옷은 버리고 장마당에서 산 외제 속옷만 입고 다녔다. 집안의 후원이 없는 그는 이들과 생활 수준을 맞추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눈을 뜨니 길이 보였다. 당시 신계군 접경 평산군 시장엔 한국 물품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평산군과 인접한 개성공단에서 흘러나왔는데, 개성 시장은 단속이 심하니 이웃 평산 시장에 주로 넘겼던 것이다.
외출 허락을 받은 날이면 차를 타고 1시간 거리 평산에 갔다. 여단 병원 간호사인 그는 아는 군인들이 많아 어렵잖게 군용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한국 초코파이나 라면 등을 사서 혜산 집에 보냈다. 꽤 많은 차액을 남기고 주변에 팔았다.
번 돈은 뇌물로 써서 남은 복무 기간에 한 달짜리 휴가를 두 번 따냈다. 이때 학교를 다녔던 마양도에서 말린 멸치나 까나리 같은 건어물을 사서 혜산에 들어가 팔았다. 돈이 많이 남았다. 군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었기에 열차 안전원들에게 단속되지 않았다.
이렇게 마련한 종잣돈으로 평산 시장을 왕래하며 장사를 했다. 차익으로 초코파이나 라면을 사서 군관 아내들에게 가지고 가면 무척 좋아했다. 군관들이 사 먹기엔 너무 비싼 데다 뇌물용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군 간부 아내들을 구워삶으니 입당도 수월했다. 2013년 4월 중사 채수향은 6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증을 받았다. 원래는 7년이었지만 운도 따라 조기 제대할 수 있었다. 당원이란 목표를 이뤘는데 굳이 1년을 더 군에서 낭비할 이유도 없었다.
● “2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까.”
제대된 그는 양강도 삼지연시 포태노동자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양도로 가려던 부모님 계획은 끝내 실패했다. 그해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병명도 잘 몰랐지만 돌아보면 금을 제련하느라 독한 질산이나 수은에 많이 노출됐던 때문인 듯했다.결과적으로는 군 기지여서 다른 지역 외출도 쉽지 않던 마양도로 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시엔 그걸 알지 못했다.
채 씨는 간호사 경력을 인정받아 포태병원 간호사로 발령받았다. 병원에 가보니 열악한 군 병원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약이 하나도 없었다.
의사들은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써준 뒤 환자들이 장마당에서 약을 구입해 오면 그걸로 치료를 했을 뿐이었다. 장마당에 가짜 약도 유통되기 때문에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약을 사 달라고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의사는 단골 약장수에게서 약을 사 오곤 수고비를 챙겼다. 가끔 수술 환자들이 생기면 의사들은 당당하게 얼마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병실 난방이나 식사도 환자들이 직접 돈으로 사서 해결했다.
제대할 때 채 씨의 목표는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이것도 엄청난 뇌물이 드는 일이었다. 무직으로 장사를 하면 처벌을 받으니, 1년 정도 간호사로 이름을 올려 두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에 돈을 내면 출근을 인정해 줄 때였다. 직장에 다니며 월급과 배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야 출근을 인정받는 기이한 시스템이 일반적이엇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대신 낸 돈은 간부들이 먼저 삼키고, 나머지 어느 정도는 출근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사서 주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포태병원은 간호사들이 한 달 동안 출근하지 않는 대가로 쌀 60kg에 해당하는 돈을 내야 했다. 그 이상 돈을 벌 자신 있으면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 장사할 능력이나 밑천이 없으면 출근하는 식이었다. 직장에서는 일만 하지 않고 각종 노력 동원에 차출돼 출근하지 않은 사람들 몫까지 감당했다.
채 씨는 병원에 다닌 지 두 달째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마침 자신보다 2년 먼저 해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언니가 중국 쪽과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국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밀수는 더 이상 불법 활동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장사였다. 국가가 하달한 각종 통제 지침에 따르면 북한에선 숨 쉬는 것 외엔 다 불법이었다.
그는 언니에게서 속성으로 밀수 과외를 받았다. 어떤 밀수품이 돈이 되는지, 어떻게 물건을 확보해야 하는지, 밀수를 위해선 누구를 구워삶아야 하는지, 단속을 책임진 지역 보위부 보안원 국경경비대 등 주요 인물 성향과 약점이 무엇인지, 중국 대방(밀수 거간꾼)과의 접선 방법 및 돈 받는 방법 등을 파악해야 했다.
첫 실전 거래 물품은 약초였다. 밤 10시. 언니가 모집한 짐꾼들과 짐을 나눠 메고 집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떨어진 압록강 변으로 갔다. 강물에 발을 들여놓기 전 몹시 떨렸다.
“이러다가 잡히면 군에서 힘들게 얻은 당증(黨證)이 날아가는 것이 아닐까.”(채 씨)
“야, 당증이 밥을 먹여주니?”
그 말을 하는 언니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자기도 제대군인 당원인데 2년 만에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까.’
그땐 몰랐다. 1년 뒤 자신이 밀수가 아닌, 영영 북한을 떠나는 탈북을 선택할 줄을….
● 짐꾼 열 명을 거느린 처녀 밀수꾼
군복을 입고도 장사를 한 그에게는 처음이 어려웠지 다음부터 점점 더 쉬워졌다. 가슴까지 오는 고무로 된 바지를 입고 허리까지 빠지는 압록강에 뛰어드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손에 쥐는 돈뭉치도 두툼해졌다. 피가 다시 끓었다. 두 달 뒤엔 언니 없이 혼자 다닐 수 있었다.취급하는 물건도 다양해졌고 짐꾼 숫자도 늘어났다. 동네 건장한 남성은 다 짐꾼이라고 보면 됐다. 밑천이 없거나, 조직 생활에 매여 잡히면 크게 고초를 겪을 남성들이 짐꾼을 자처했다.
이들은 40~50kg 되는 배낭을 메고 압록강을 건너가 지정된 곳에 물건을 놓고 다시 왔다. 저녁 서너 시간 짐꾼 역할이면 옥수수 10kg은 살 수 있는 10위안 정도를 벌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짐을 날라 줘도 먹고사는 것이 해결됐다.
중국 대방들도 각자 독점 구역이 있어 상대하기 편했다. 지정된 위치에 짐을 놓으면 차가 와서 실어 갔는데 큰 다툼도 없었다.
그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강을 넘었다. 나중엔 짐꾼을 열 명까지 인솔하고 다녔다. 한 번 다녀오면 수백 위안이 남았다. 1년 동안 2만 위안을 벌었는데, 대학 입학은 물론 혜산 시내에 큰 집도 살 수 있었다.
밀수가 거듭될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그가 밤중에 짐꾼들을 데리고 강을 넘나드는 것을 보위부나 안전부, 경비대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뇌물을 받고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가끔 뇌물이 적다고 생각하면 사람을 시켜 길목에 잠복하고 있다가 단속하는데, 그런 식으로 1년 동안 두 번이나 물건을 빼았겼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 줄은 알지만 어디 가서 복수를 할 수도 없어 혼자 분을 삼킬 뿐이었다.
그가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상대하는 간부들 급도 올라갔다. 그전에는 마을 보위원을 상대하다 1년 뒤엔 보위부장이 그를 찾았다. 어떤 보안서 간부는 차량으로 물건을 싣고 와서 중국에 팔아달라고 요구했다. 단속으로 뺏은 물건이라면 뺏긴 사람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2014년 여름 혜산 시내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2박 3일 머무를 숙박업소 역할을 하는 개인 집에 돈을 내고 투숙했는데 밤중에 보안원들이 숙박 검열을 한다며 들이닥쳤다. 신분증을 제시했지만, 다짜고짜 신분 확인을 해야 한다며 보안서에 끌고 갔다.
다른 지역 출신이라면 숙박검열 단속 대상이었겠지만, 그가 사는 삼지연 포태와 혜산은 차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한 동네나 마찬가지여서 여행증도 필요 없었다. 게다가 혜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많았다. 무슨 잘못을 했냐고 항의해도 보안원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날 밤 숙박검열로 잡혀 온 사람이 100명은 넘었는데, 이튿날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 첫날, 혜산역에서 화차에 든 시멘트를 하역하는 일을 했다. 한여름에 땀범벅 된 몸에 시멘트 가루까지 묻어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오는 길에 보안원은 압록강 옆에 사람들을 세우더니 강에 들어가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다. 24세 처녀가 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씻을 수는 없었다. 입은 옷 그대로 강에 들어갔다 나올 때 그의 가슴은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잘못한 것도 없이 끌려와 인간 이하의 모멸감을 강요당하는 더러운 나라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 보안원이 그를 부르더니 휘발유 20kg을 내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뇌물까지 바치며 나가고 싶지 않았다.
혜산에 가서 실종된 그를 가족들이 연줄을 총동원해 찾은 뒤 며칠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수용소 문을 나서며 그는 결심했다.
“한국에 가야겠다.”
그동안 밀수를 하며 중국과 한국에 대해 눈을 떴다. 중국 대방들은 직업이 없었는데, 북한에선 남자가 직업이 없으면 처벌을 받았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중국이 참 신기했다.
중국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를 향해서도 욕을 했는데, 그런 표현의 자유가 좋았다. 나중엔 중국 사람들이 김정은을 비난할 때도 그는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군에서 당원이 되기까지 6년 동안 세뇌된 사상은 바깥 세계를 경험하면서 금방 희미해졌다.
장백에도 몇 번 가 봤는데 밤에도 불 밝은 세상이 신기했다. 대학 선택의 자유가 있고 심지어 돈이 있으면 유학까지 갈 수 있는 중국이 그렇게 놀라울 수 없었다. 그런 중국 사람들이 침이 마르게 한국이 좋다며 칭찬했다. 장백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한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 가족을 데리고 탈북길에 오르다
한국행을 결심하니 길도 보였다. 먼저 탈북한 5촌 외숙이 있었는데, 작정하고 달라붙으니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5촌 외숙은 어서 오라며 한국행을 도와주는 브로커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조용히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어머니와 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 간다고 하면 재산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러다가는 주변의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2014년 11월 24일. 떠나기로 정한 날짜가 왔다. 저녁밥을 먹고 그제야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한국에 갈 거야. 준비 다 끝났어. 엄마와 동생도 함께 갔으면 좋겠어.”
놀란 것은 오히려 채 씨였다. 딸의 폭탄선언을 들은 어머니는 놀란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그래. 가야지. 조금만 기다려.”
모녀는 부친의 사진과 약간의 돈만 챙겼다. 12세 늦둥이 남동생에겐 연길 구경을 간다고 했다. 가면 맛있는 것 많이 사준다고 하니 동생도 순순히 따라가기로 했다. 그가 속내를 터놓은 지 한 시간도 안 돼 세 식구는 집을 나섰다.
근처에 살던 언니에겐 뒷정리를 맡겼다. 온 가족이 탈북하다가 체포돼 북송되더라도 북에 남아 있는 혈육이 있어야 뇌물을 쓰거나 뒷바라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채 씨 가족은 예정된 밀수 거래인 양 짐꾼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체포돼도 밀수하러 간다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챙기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체포됐을 때 거액이 나오면 탈북이라고 의심받기 때문이다.
각오했던 만약의 사태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 짐을 내려놓고 짐꾼들이 돌아가자 채 씨 가족은 중국 대방 차를 타고 장백으로 갔다. 5촌 외숙이 알려준 루트대로 연길과 쿤밍 등을 거쳐 동남아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며칠 대기한 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5년 1월 15일 마침내 채 씨는 한국 땅을 밟았다. 군에서 제대한 지 2년도 채 안 됐다. 만약을 위해 남았던 언니도 1년 뒤 한국에 와서 서울에 정착했다. 군사분계선과 멀지 않은 포병 군단에 있었고 군 간부들을 두루 알아서였는지 채 씨에 대한 조사 기간은 남들보다 길었다. 한 달 만에 끝날 조사를 3개월이나 받았다.
하나원을 거쳐 사회에 나온 것은 그해 6월. 첫 정착지는 5촌 외숙이 사는 울산으로 정했다. 외숙은 울산에 일자리도 많으니 여기서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울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25세였던 그는 일자리보단 숙원이던 대학 생활을 하고 싶었다. 몇 달 지내며 파악해 보니 가고 싶은 대학은 다 서울에 있었다. 서울로 가야 했다. 그해 9월 채 씨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상경했다. 외국인들이 숙소로 쓰는 허름한 곳에 짐을 풀었다.
● 돌 위에도 뿌리 내리는 씨앗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가 스스로 북에서 왔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유창한 영어로 무역 거래를 성사시키고 세계를 누비며 사는 이 젊은 사장이 불과 10여 년 전엔 북한군 간호사였다니 믿기지 않는 것이다.성공이 쉽게 찾아오진 않았다. 서울에서 1년간 대입 준비를 한 끝에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경영학을 선택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려면 경영, 특히 회계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상 대학에 다녀 보니 교실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다. 시장경제를 몸으로 배우고 싶어 일반 회사에 취직해 월급 120만 원을 받으며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외국계 회사에 취직해 세계를 다니고 싶은 꿈이 가장 컸다. 그러자면 무엇이 부족한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영어가 제일 걸림돌이었다.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뒤 2017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상품 전시회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곳에 가면 취직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전시회 참가 기업들에 명함도 많이 돌렸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한국 진출을 원하는 식품 회사를 만나게 됐다. 그 회사가 한국에 진출했을 때 서울 본부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경험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다시 대학도 다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회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회사도 한국 비중을 대폭 줄이게 됐다.
2020년 8월 그가 식품을 수출하는 회사를 창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동안 익힌 것을 창업으로 써먹으려 했다. 한국 회사가 아닌 미국 회사에서 일한 경험은 또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식품 수출이라고 하면 한국 식품을 해외에 파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는 미국 기업의 시각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는 방식을 배웠다.
한국이 아닌 동남아로 갔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식품을 제조해 미국 시장에 파는 역발상을 한 것이다. 지금은 대만 식품을 미국에 파는 사업이 주력이다. 사업은 점점 커졌고 매출액도 해마다 커지고 있다. 규모가 커지니 다른 시장도 보여 한국 화장품을 동남아와 중동에 파는 사업도 새로 시작했다.
제대한 지 1년도 안 돼 큰 집을 살 돈을 벌었던 그였다. 한국에 와서 10년도 안 돼 서울 강남 인근에 좋은 아파트도 장만했다. 사업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야심도 점점 커질 것 같은데 그의 꿈은 너무나 소박했다.
“예전에는 큰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고 싶었고요. 그런데 이젠 소원이 더 작아졌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온 가족이 건강하고 큰 문제 없이 잘 살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여유가 있으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바람이 현재의 진정한 소원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넘어온 거친 삶의 굴곡들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 앞으로 걸어갈 먼 인생길 어느 언덕에서 채수향은 분명히 더 큰 꿈을 새로이 만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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