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엔 봄내 봄 내음 물씬[여행스케치]

1 week ago 8

강원 춘천

강원 춘천시 청평사 선착장에서 바라본 봄비 내리는 소양호. 병풍처럼 둘러싼 산등성이들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유람선 한 척이 유유히 다가오고 있다.

강원 춘천시 청평사 선착장에서 바라본 봄비 내리는 소양호. 병풍처럼 둘러싼 산등성이들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유람선 한 척이 유유히 다가오고 있다.
너는 춘천에 다녀왔다고 했다. 입학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술을 마신 듯 발그레했다. 혼자서 닭갈비를 먹었다고 했다. 명문대 좋은 과에 수석으로 붙은 네가 생활에 쫓길 일은 없어 보였다. 대학로 술집 골방에서 동문 선배들은 술을 권했다. 너는 마다하지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순 없었다. 너는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다. 술기운이 돌고 고개들이 주억거렸다. 누군가 ‘소양강 처녀’를 읊조렸다. 모두 따라 했다. 목 놓아 부를 일은 아니었는데 소리는 커져만 갔다…. 문득 한 세대 전 네 모습이 생각났다. 조금은 지쳐 있었나 보다. 너를 싣고 갔을 통일호 열차는 이제 없다. 경춘선 itx-청춘에 올라탔다.

● 맑고 평온하게

아마 너도 그때 갔을 터다. 소양호에서 청평사(淸平寺) 가는 배에 올랐다. 소양호는 위도 38도선 위에 걸쳐 있다. 지금이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 호수 양쪽 기슭 산자락을 적시며 배는 나아간다. 고물 뒤로 하얀 물보라가 퍼져 나간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15분 남짓. 선착장에 다다른다.

청평사 가는 길에 있는 구성폭포.

청평사 가는 길에 있는 구성폭포.
청평사 오르는 길은 신록이 완연하다. 진달래와 철쭉 황매화 산수유 등속이 연두 숲에서 점점이 색을 발한다. 계곡물 흘러내리며 삽상한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의 시작은 아마도 구성(九聲)폭포다. 주위에 멋들어진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다고 해서 구송폭포라고도 했단다. 8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뒤로 하고 다시 걷는다.

청평사 가는 길 연못 영지에 비가 내린다.

청평사 가는 길 연못 영지에 비가 내린다.
네모난, 정확히는 기다란 사다리꼴 연못이 나온다. 그림자 영(影)자를 써서 영지(影池)인데 비출 영(映)자를 쓰기도 했다. ‘청평사 뒤 오봉산 부용봉 바위가 비친다’ ‘절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못에 청평사가 투영된다’ ‘산 능선을 걷는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등 유래가 여럿이다. 고려 중기 12세기 초, 아내와 사별하고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이곳에 은거한 이자현(1061~1125)이 조성했을 것이다. 큰 가뭄이나 홍수 때도 연못 물이 줄거나 늘지 않았다고 한다. 쳐다보는 이의 마음도 그렇게 평온하기를 바라는 걸까.

청평사 전경. 맨 앞에 보이는 문이 보물 제164호 회전문이다.

청평사 전경. 맨 앞에 보이는 문이 보물 제164호 회전문이다.
고려 초기 창건했다는 청평사는 큰 절은 아니다. 사찰 입구 일주문도 없고 가람도 비좁다. 법당 극락전은 불에 탄 것을 몇십 년 전에 중건했다. 안내판 설명은 6·25전쟁 때 소실됐다고 했지만, 그전에 정신착란을 일으킨 여성이 불을 질러 전소했다는 기사(조선일보 1950년 2월 15일 자)가 있다.

청평사 경내에서 바라본 회전문.

청평사 경내에서 바라본 회전문.
다만 두 번째 문인 천왕문 격의 회전문(迴轉門)이 있다. 고쳐 지은 지 500년쯤 된 보물이다. 공주를 사랑한 뱀이 있었다. 사랑이 지나쳐 공주 몸을 빙빙 감고 놓아 주지 않았다. 부처에게 공덕을 드리겠다는 말에 풀어 줬다. 불사(佛事)는 마쳤지만 공주는 나오지 않았고 뱀은 이 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도리어 천둥번개 치며 쏟아지는 폭우에 떠내려갔다.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번뇌에선 풀려난 셈이다. 실제 빙빙 돌지는 않는 회전문은 윤회전생(輪迴轉生)의 문이다(전석순, ‘춘천’, 21세기북스, 2020).

영지를 지나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영지를 지나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회전문으로 들어서고 회전문으로 나왔다.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선착장으로 향한다. 연지에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차분하게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다 사라진다. 병풍처럼 서 있는 산들 사이로 멀리 유람선 한 척 다가온다. 물안개가 산등성이 곳곳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이자현의 사촌이 반란을 일으킨 왕의 외척 이자겸이다. 권력을 집착해 제명에 못 죽은 친척과 달리 이자현은 청평거사라 불리며 천수를 다했다. 머리는 비에 젖었지만 마음은 맑고 평온했다.

● 푸르고 잔잔하게

35년 전 네가 처음 찾았을 때도 그랬듯 춘천은 호반의 도시다. 하지만 그 이름에 호수는 없다. 봄 춘(春), 내 천(川). 봄의 내, ‘봄내’다. 봄이 먼저 와서 흐른다. 댐이 서면서 호수가 생겼다. 섬이 그 안에 생겼다. 중도가 그렇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자리에 쌓인 퇴적물이 만들어 낸 섬이 중도다. 둘로 나누어져 상중도와 하중도가 됐는데 흔히 하중도를 가리킨다(‘춘천’). 네가 만약 그때 가 봤다면 배 타고 의암호를 가로질렀을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원 모양 주탑이 케이블로 상판을 견인하는 춘천대교로 간다.

의암호 공지천 출렁다리 ‘춘천 사이로 248’에서 본 벚꽃길. 그 너머로 보이는 다리가 춘천대교다.

의암호 공지천 출렁다리 ‘춘천 사이로 248’에서 본 벚꽃길. 그 너머로 보이는 다리가 춘천대교다.
외지 관광객을 끌어모으려는 다른 지방 도시처럼 중도 주변에도 스카이워크와 출렁다리가 생겼다. 너는 보지 못했을 풍경이다. 중도에서 뭍을, 뭍에서 그 섬을 보면 뭔가 아련하고, 호수 위에서 섬과 뭍과 물을 보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너울이 이는 바다에 산처럼 솟은 섬과 달리 잔잔하고 푸른 수면 위에 다져 놓은 단 같은 땅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소양강처녀상. 왼쪽 뒤로 소양스카이워크와 쏘가리상이 보인다.

소양강처녀상. 왼쪽 뒤로 소양스카이워크와 쏘가리상이 보인다.
춘천대교 동북쪽 소양강 어귀 소양스카이워크 부근에 소양강처녀상(像)이 있다. 5m 높이 기단에 7m 높이로 서 있다. 위압적인데 살짝 관능적이다. ‘열여덟 딸기같이 어린 내 순정’이라는 노랫말이 무색해진다. 호반이 주는 봄의 흥취와 살짝 엇박자가 난다고나 할까.

중도에서 바라본 공지천 출렁다리 ‘춘천 사이로 248’.

중도에서 바라본 공지천 출렁다리 ‘춘천 사이로 248’.
춘천대교 남쪽 공지천 어귀에는 출렁다리 ‘춘천 사이로 248’이 있다. 다리에 올라서서 양 천변을 바라본다. 벚꽃길이다. 제철의 마지막 벚꽃이 흐드러졌다. 다리 가운데에서 중도가 마주 보인다. 멀리 앞뒤로 늘어선 낮고 높은 산들을 배경으로 빨갛고 파랗고 노란 건물과 구조물 들이 보인다. 거대한 색동 블록을 쌓아 놓은 듯하다.

공지천 벚꽃길. 올 마지막 벚꽃이 흐드러졌다.

공지천 벚꽃길. 올 마지막 벚꽃이 흐드러졌다.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곳이 레고랜드다. 중도에 들어서 레고랜드로 향하는 것은 탐험에 나서는 것 같다. 황량한 땅에 철제 울타리가 빙 둘러쳐 있다. 미지의 보물섬일 수도, 킹콩의 ‘해골 섬’일 수도 있다. 호텔과 놀이동산이 있는 그곳은 블록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환상의 섬이다. 밀레니얼 세대 부모가 알파 세대 자녀들과 함께 블록으로 만든 미니어처 서울 도심, 경복궁, 야구장 사이를 거닌다.

공지천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중도 레고랜드 전경.

공지천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중도 레고랜드 전경.

레고랜드 파크(놀이동산)에서 볼 수 있는 블록으로 만든 서울 도심 미니어처.

레고랜드 파크(놀이동산)에서 볼 수 있는 블록으로 만든 서울 도심 미니어처.
그 울타리 밖은 역사의 땅이다. 선사시대와 철기시대 유적과 유물들이 땅 위아래 산재한다. 개발과 일자리, 그리고 보존이라는 언어와 행동이 부딪힌다. 레고랜드에서 10여 분 걸으면 철기시대 돌무지무덤(적석총)이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도 놓여 있다. 고인돌 저 너머로 울긋불긋 레고랜드가 보인다. 중용의 길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레고랜드 인근 고인돌과 철기시대 돌무지무덤(적석총).

레고랜드 인근 고인돌과 철기시대 돌무지무덤(적석총).

● 춘천은 봄꽃

춘천대교에서도, 스카이워크에서도, 출렁다리에서도, 레고랜드에서도 그 산이 보인다. 춘천의 주산 봉의산(鳳儀山·해발 300.3m)이다. 너는 아마 이 산에 오를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여행지로 이름이 난 곳도 아니었다. 왠지 발걸음이 옮겨졌다.

봉의산 정상으로 가는 길.

봉의산 정상으로 가는 길.
강원도청 뒷길을 따라 30분 정도. ‘봉의산’ 표지석이 꽂힌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웃자란 나무들과 뻗어 나온 잎들에 시야가 확 트이지는 않는다. 그 틈바구니로 본다. 춘천은 분지였구나. 그것도 산들이 두 겹으로 에워싼. 춘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금병산 대룡산 마적산 오봉산 가덕산 북배산 등이 안에서 둥그렇게 스크럼을 짜고, 그 바깥으로 더 높은 수리봉 가리산 용화산 구절산 부용산 촛대봉 등이 비를 가려 주듯 어깨동무하고 서 있다.

봉의산에서 바라본 남쪽 춘천. 오른쪽 뒤로 보이는 산이 안마산이다.

봉의산에서 바라본 남쪽 춘천. 오른쪽 뒤로 보이는 산이 안마산이다.
춘천 출신 작가 전석순에 따르면 어느 외국인 선교사는 봉의산을 꽃술, 둘러싼 산들을 꽃잎으로 보고 춘천을 한 송이 꽃에 비유했다(‘춘천’). 춘천은 지금 봄 내음 물씬한 봄꽃인 셈이다.

봉의산을 내려와 약사 고갯마루에 있는 죽림동 성당에 들렀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은 로마네스크 양식 본당으로 향한다. 인간의 고통을 사랑으로 보듬는 예수성심상이 잔디밭에 하나, 성당 입구에 더 큰 것이 하나 서 있다. ‘너는 그곳에서 잘 있는 거니?’

약사고개 중림동 성당. 잔디밭 사잇길은 본당 정문으로 향한다(위 사진). 성당 입구 예수성심상. 춘천 시내를 안을 듯 두 손을 벌리고 있다.

약사고개 중림동 성당. 잔디밭 사잇길은 본당 정문으로 향한다(위 사진). 성당 입구 예수성심상. 춘천 시내를 안을 듯 두 손을 벌리고 있다.

서울 청량리로 돌아오는 전철을 탄다. 흘러가는 한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터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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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춘천=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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