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사라졌다" vs "이민자 단속이 법치"…둘로 나뉜 워싱턴

3 days ago 2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가 1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열병식을 관람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가 1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열병식을 관람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전역에서 탄압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통령이 자기 생일에 군사력을 과시하다니, 너무 이상하죠.”(피터, 22)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법을 따르고 있어요.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더글러스 거카, 82)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는 둘로 쪼개진 세계 같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이자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일인 이날 워싱턴에서는 링컨기념관에서 워싱턴모뉴먼트 에 이르는 ‘내셔널 몰’ 일대에서 탱크와 헬리콥터 등을 동원한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워싱턴에서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된 것은 걸프전 때인 1991년 이후 34년 만이다.

같은 시각 백악관 북쪽 라파예트 스퀘어 일대에서는 수백여명이 참가한 반(反) 트럼프 시위가 진행됐다. 이곳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심 교차로, 광장, 대형마트 등 곳곳에서 ‘왕은 없다(No Kings)’고 적힌 피켓이 등장했다.

○숙원 푼 트럼프

열병식이 열리는 내셔널 몰 일대는 평화로운 축제 분위기였다. 미 육군은 남북전쟁 시대의 기병대, 2차 세계대전 때 썼던 셔먼 탱크, 최신 에이브럼스 탱크와 팔라딘 자주포 등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군복과 무기를 갖추고 순서대로 행진했다. 한국전쟁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행사장소 한켠에선 시민들이 직접 전차를 만져보고 무기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예고됐으나 행사가 끝날 때까지는 하늘이 맑았던 덕분에 시민들은 늦은 밤 불꽃놀이까지 모두 즐길 수 있었다.

열병식이 열린 14일 워싱턴DC 내셔널몰 일대에서 관람객들이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열병식이 열린 14일 워싱턴DC 내셔널몰 일대에서 관람객들이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열병식에는 군인 6700명, 차량 150대, 항공기 50대, 말 34마리, 노새 2마리, 개 한 마리 등이 동원됐다고 육군은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멜라니아 여사,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과 함께 백악관 인근 대형 무대에서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군인들이 지나가며 경례를 붙이면 일어서서 거수경례로 답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기 때에도 열병식을 추진했으나 당시엔 참모진의 만류로 성사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숙원을 풀게 됐다.

미시건주에서 8시간 운전해 워싱턴까지 왔다는 서맨사(36) 씨는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자라면서도 “남편이 주한미군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육군의 250주년 행사를 보러 올 이유가 된다”고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이날 VIP로 초청받은 거카 씨는 “어차피 모든 날은 누군가의 생일”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왕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옹호했다.

참전용사인 더글러스 거카(오른쪽)와 헬리 더튼(왼쪽) 씨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참전용사인 더글러스 거카(오른쪽)와 헬리 더튼(왼쪽) 씨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시위대 “법치가 사라졌다”

그러나 열병식 장소 바깥의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워싱턴DC와 버지니아주 일대에서 마주친 여러 시위대는 미국 헌법 서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우리는 국민이다(We the people)”, “우리가 헌법이다” 등의 구호로 뒤덮여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초 헌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직접 ‘노 킹스’라고 적어넣은 티셔츠를 입고 워싱턴DC에 나온 커플 애나 씨와 필릭스 씨는 “자신의 생일에 4500만달러나 되는 돈을 열병식에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워싱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피터(22) 씨가 열병식 장소에서 '노 킹스' 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워싱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피터(22) 씨가 열병식 장소에서 '노 킹스' 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진보성향 단체 인디비저블과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등은 전국 2000여곳에서 ‘50501 운동(50개 주, 50개 시위, 하나의 목소리)’을 추진했다. 이날 필라델피아에선 10만여명이 운집했다. 뉴욕에서도 5만여명, 로스앤젤레스(LA)에선 2만5000여명이 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주최측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일대에선 시위대가 테슬라 쇼룸 주변을 행진하며 ‘노 트럼프, 노 일론, 노 파시즘’ 등의 구호를 외쳤다. 테슬라 차량이 지나가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특히 LA와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조지아주 애틀랜타 등에선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최루액이 발사됐다.

미네소타주에선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정치인들이 총격을 당하는 일이 벌어져 집회가 취소됐다. 이날 새벽 미네소타 주의회 소속 민주당 하원의원 멜리사 홀트만과 배우자는 자택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용의자는 같은 주의회의 존 호프먼 상원의원도 저격했으나 부상에 그쳤다. 해당 용의자는 낙태를 반대하는 복음주의 기독교도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치가 사라졌다” vs “이민자 단속이 법치” 둘로 쪼개진 워싱턴

한편 이번 시위가 격발된 원인이었던 불법이민자 단속은 당분간 다소 누그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 SNS에 “우리의 위대한 농부들과 호텔 및 레저업체 관계자들은 매우 공격적인 이민 정책이 유능하고 오랜기간 일한 근로자들을 앗아가고 있으며 그 일자리가 대체하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13일 이민세관단속국(ICE) 지역 담당자들에게 “농업, 식당, 호텔 등에 대한 조사 및 활동을 중단해 달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법치가 사라졌다” vs “이민자 단속이 법치” 둘로 쪼개진 워싱턴

“법치가 사라졌다” vs “이민자 단속이 법치” 둘로 쪼개진 워싱턴

워싱턴=이상은/실리콘밸리=송영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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