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햇살과 함께 예술 산책… 먹고 자는 공간에도 작품들 가득[허진석 기자의 아트로드]

1 week ago 4

미술로 즐기는 필리핀 케손-안티폴로
필리핀 정서 살아있는 현대미술품… 삶과 예술이 빚어내는 울림 느껴져
시티투어하며 독립의 역사도 체험… 지난해 개장한 현대적 감각 리조트
예술품과 미식에 물놀이 시설까지… 미학적 휴식 누리는 ‘도심 오아시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찾았다가, 바람과 햇살이 어우러진 자연 속에서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멋진 경험을 할 줄은 몰랐다.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 자리 잡은 그리스 건물 같은 하얀색의 미술관은 그 자체로 평안함을 안겨 줬다. 필리핀 예술가들의 현대미술품들은 뻥 뚫린 창으로 드나드는 자연의 숨결과 함께 관람객을 맞았다.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섞인 마닐라 도심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이다. 숲과 도시, 질서와 혼돈이 주는 대비가 강렬하다. 조용한 숲속에서 평화롭게 들려오는 새 소리와 함께, 작가들이 던져 놓은 인생의 실마리 같은 작품들을 보며 자신만의 사색에 빠지는 즐거움, 예사롭지 않다.

● 식물원과 공생하는 복합 예술공간, 핀토 아트 뮤지엄

여행 짐은 메트로 마닐라의 16개 시 중 하나인 케손시에 있는 ‘솔레어 리조트 노스’에 풀었다. 핀토 아트 뮤지엄은 여기서 차로 1시간 가량 동쪽에 있다. 행정적으로는 메트로 마닐라의 외곽 리잘주(州)의 주도 안티폴로시에 속한다.

핀토 아트 뮤지엄의 전시실은 자연과 분리돼 있지 않고 넓은 창으로 바람이 오간다. 
핀토 아트 뮤지엄 제공

핀토 아트 뮤지엄의 전시실은 자연과 분리돼 있지 않고 넓은 창으로 바람이 오간다. 핀토 아트 뮤지엄 제공
핀토 아트 뮤지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술관 같다. 최대 2만㎡에 달하는 식물원 안에 여섯 개의 지중해풍 건물이 조용히 빛을 내고 있다. 실랑안 가든(Silangan Gardens)이라 불리는 식물원에는 500여 필리핀 토종 식물과 나무, 꽃들이 식재되어 있다. 미술관의 주요 전시동과 야외 조각, 산책로, 카페 등이 연못과 수목, 꽃길, 수직정원(Vertical Garden) 등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미술품이 전시된 건물은 유리가 없는 창문이 넓고 큰 형태여서 미술품과 자연의 경계가 마치 같이 전시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미술관은 신경과 전문의였던 조벤 쿠아낭 박사(1939∼ )가 자신의 방대한 필리핀 현대미술 소장품을 바탕으로 2010년 설립했다. 그는 하버드 의대 임상신경학 장학생 출신으로 필리핀 최고의 신경과 전문의 중 한 명이다. 세인트 루크스 병원(St. Luke’s Medical Center)에서 오랜 기간 의사와 병원장으로 재직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예술이 뇌와 마음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에 많은 관심을 두고, 의료계와 예술계에서 모두 활발히 활동했다. 1980년대에는 상업 갤러리에서 외면받던 젊은 작가들을 지원했는데, 이들이 모여 살링푸사(Salingpusa) 현대미술 집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이후 필리핀 현대미술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핀토 아트 뮤지엄의 야외 벽면에 설치된 조각상들. 인체의 유려한 곡선과 동작, 서로를 향한 손길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조화가 돋보인다. 공간과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안티폴로=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핀토 아트 뮤지엄의 야외 벽면에 설치된 조각상들. 인체의 유려한 곡선과 동작, 서로를 향한 손길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조화가 돋보인다. 공간과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안티폴로=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미술관에는 모두 1000점 내외의 현대미술과 조각, 설치미술, 원주민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필리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엘머 볼롱가, 마크 저스티니아니, 조세 존 산토스 3세 등의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살링푸사 집단의 작품 ‘카르나발(Karnabal)’은 세로 3.6m, 가로 12m에 달하는 대형 벽화로, 마르코스 정권 이후 필리핀 사회의 혼란과 희망을 축제에 비유해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핀토 아트 뮤지엄 야외에 있는 청동 군상 작품. 자연의 햇살과 바람이 느껴지는 곳에서 즐기는 필리핀 현대미술 관람은 여행객을 사색에 빠지게 한다. 식물원에 둘러 싸인 미술관을 둘러보는 예술적 산책은 이색적인 즐거움이다. 안티폴로=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핀토 아트 뮤지엄 야외에 있는 청동 군상 작품. 자연의 햇살과 바람이 느껴지는 곳에서 즐기는 필리핀 현대미술 관람은 여행객을 사색에 빠지게 한다. 식물원에 둘러 싸인 미술관을 둘러보는 예술적 산책은 이색적인 즐거움이다. 안티폴로=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건물을 빠져나와 야외를 산책하다 보면 돌로 만든 작은 수조에 설치된 청동 군상 조각들도 만나게 된다. 수면에 뜬 느낌을 주는 인물 조각들은 심각한 대화를 나누거나 쪼그리고 앉자 고민을 하고 있다. 물 위의 푸른 연꽃잎과 대비되는 구리빛 청동상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인간들은 무슨 고민이 저리들 많을까’라는 존재적 성찰을 하게 된다.● 자연과 역사의 도시, 케손

케손시는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필리핀 현대사의 중요한 흔적들이 곳곳에 새겨진 도시다. 니노이 아키노 공원과 야생동물 센터는 약 24헥타르의 부지에 4500여 종의 나무와 1400여 마리의 동물이 서식하는 생태적 오아시스다. 1970년에 문을 열어 도시민들에게 자연과의 만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다양한 앵무새와 공작, 독수리 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이 센터는 불법 밀렵이나 거래, 부상 등에서 구조된 동물을 보호하는 임시 거처 역할도 한다. 여기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는 또 다른 도심 생태 공원인 ‘라 메사 에코파크’가 있다는 말을 케손시티관광청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케손 메모리얼 서클에 있는 마누엘 케손 대통령 동상과 기념탑. 케손시티관광청 제공

케손 메모리얼 서클에 있는 마누엘 케손 대통령 동상과 기념탑. 케손시티관광청 제공
니노이 아키노 공원은 필리핀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을 만나는 길로도 이어져 있다. 케손 메모리얼 서클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주도한 마누엘 케손 대통령을 기리는 66미터 높이의 기념탑과 넓은 공원으로 조성된 국립공원이다. 이 기념탑의 높이는 케손 대통령이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인 66세를 의미한다. 필리핀의 주요 섬인 루손, 비사야, 민다나오 등을 상징하는 세 개의 탑으로 돼 있다. 이탈리아 예술가 프란체스코 리카르도 몬티가 조각한 세 천사상이 탑 위에 있고, 기념탑 지하에는 케손 대통령과 부인 아우로라의 묘소가 안치돼 있다.

케손 헤리티지 하우스에서는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삶과 리더십을 더욱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1927년 뉴 마닐라 길모어 거리에 있던 케손 가족의 주말 별장을 2013년 케손 메모리얼 서클로 이전해 복원한 것이다. 케손 대통령은 결핵 치료를 위해 이 집에서 요양하며 주말을 보냈고, 이곳에서 고위 인사들과의 만남을 가져 비공식적인 정치적 논의의 장으로도 활용했다. 집안에는 케손 대통령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생활 공간, 가족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필리핀 자치정부와 대통령제로의 이행을 이끈 정치가의 개인적 삶을 엿볼 수 있다.

● 예술과 휴식이 공존하는 솔레어 리조트 노스

솔레어 리조트 노스의 엘리베이터 대기 공간에 전시된 현대 추상 회화 작품. 케손=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솔레어 리조트 노스의 엘리베이터 대기 공간에 전시된 현대 추상 회화 작품. 케손=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숙소인 솔레어 리조트 노스는 케손시 중심부에 위치한 38층 규모의 현대적인 도심형 리조트다. 작년에 새로 문을 열어 모든 것이 새롭다. 주변에 가리는 건물들이 없어 스카이라운지에서는 광대한 메트로 마닐라가 한눈에 장쾌하게 들어온다. 해가 지는 저녁 시간, 열대의 따뜻한 상승기류가 만들어 낸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노을은 가히 일품이다. 여행 기간이었던 5월 말, 멀리 떨어진 두꺼운 구름 속에서 번개가 치는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색다른 재미였다.

핀토 아트 뮤지엄 방문이 자연 속에서 미술품 감상하는 시간이라면, 이 리조트 투숙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생활 공간에서 미술품이 주는 가치를 느껴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호텔 내에는 필리핀의 전문 큐레이션 그룹인 타르지어 픽처스가 5년에 걸쳐 큐레이팅한 2700여 점의 미술품이 눈길 닿는 곳곳에 전시돼 있다. 로비나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 앞과 객실 등 거의 모든 공간에 예술품이 놓여 있다.

리조트 로비에 있는 미국 조각가 니콜라스 웬스타인의 대형 유리 조각품 ‘맹그로브’. 솔레어 리조트 노스 제공

리조트 로비에 있는 미국 조각가 니콜라스 웬스타인의 대형 유리 조각품 ‘맹그로브’. 솔레어 리조트 노스 제공
메인 로비에는 미국 조각가 니콜라스 웬스타인이 제작한 ‘맹그로브’라는 대형 유리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필리핀 토착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 체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높이 35m, 너비 28m의 세계 최대 규모 유리 조각품이다. 1층 로비의 가운데가 카지노가 있는 2층과 3층까지 뚫려 있고, 그 가운데에 조각품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식당 ‘야쿠미’에서 조리사가 일본산 해산물을 철판에서 구워주고 있다. 솔레어 리조트 노스 제공

일식당 ‘야쿠미’에서 조리사가 일본산 해산물을 철판에서 구워주고 있다. 솔레어 리조트 노스 제공
리조트 내에는 13개의 레스토랑이 있는 데, 정통의 품격 높은 맛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중식과 일식, 이탈리아식, 필리핀식 등이 있어 리조트 내에서 세계 미식 여행을 즐기는 기분을 낼 수 있다. ‘레드 랜턴’은 정통 중국 요리의 진수를 선보이는데, 40여 종의 딤섬과 풍미 깊은 북경오리가 돋보인다. 바싹한 식감을 살리기 위한 셰프의 노력이 느껴졌다. 일식당인 ‘야쿠미’는 일본 도쿄의 도요스 시장에서 직송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정통 일식 요리를 선보인다. 호텔동 38층에 위치한 ‘피네스트라’는 이탈리안 스테이크하우스로, 나폴리식 피자와 수제 파스타, 피렌체 스타일 스테이크 등 이탈리아 전통의 풍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를 즐길 수 있다. 인터내셔널 뷔페인 ‘프레시’에서는 저녁 뷔페에서 무제한으로 랍스터가 제공된다.

리조트는 야외 수영장과 작은 워터파크, 키즈클럽, 사우나, 헬스클럽 등 다양한 체육 및 휴식 시설도 갖추고 있다. 테니스와 탁구가 혼합된 듯한 피클볼을 즐길 수 있는 코트와 야외 피트니스 데크, 농구 코트 등도 갖췄다. 헬스클럽과 스파는 넓고 쾌적하게 설계돼 운동을 빠뜨리지 않는 이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것으로 보인다.

호텔 바로 옆에는 대형 쇼핑몰인 ‘아얄라 몰스 버티스 노스’, ‘트라이노마’ 등이 있어 기념품을 구입하기 편리하다. 슈퍼마켓은 트라이노마에 있는 것이 훨씬 규모가 커 말린 망고나 헤어 에센스 등 필리핀에서 많이 사 오는 소소한 선물을 사기 좋다.

리조트 내 휴식만 예상했던 여행에서, 자연과 도심형 리조트 모두에서 필리핀의 현대미술을 만나는 행운을 맞았다. 리조트 내 미술품은 여행객과 예술가, 공간을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리조트는 예술품으로 세련미를 높이고, 예술가는 작품을 알리고, 여행객은 덕분에 ‘예술적 휴식’을 누렸다.

케손·안티폴로=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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