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터넷 세상을 주름잡았지만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밀려 기억 속으로 사라지던 브랜드들이 있습니다. 초창기 웹 서핑의 대명사였던 ‘AOL’ , 전 세계 직장인들의 필수 메모 앱이었던 ‘에버노트’ , 그리고 크리에이터들의 놀이터였던 동영상 플랫폼 ‘비메오’까지.
‘퇴물’ 취급을 받으면서 죽어가던 이 낡은 앱들을 고물상처럼 주워 모은 회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나스닥 시장에 등장해 단숨에 39조원짜리 초대형 잭팟을 터뜨리며 세상을 놀라게 했죠.
바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건너온 독특한 소프트웨어 포트폴리오 기업, 벤딩스푼스(Bending Spoons)입니다.
◆창업 실패 딛고 재도전해 역대급 나스닥 데뷔
지난 7월 1일(현지시간) 미국 나스닥 시장에 데뷔한 벤딩스푼스의 주가는 상장 첫날부터 폭발했습니다. 공모가인 주당 29달러로 시작한 주가는 첫날에만 무려 39.7% 급등하며 40.50달러로 거래를 마쳤습니다.
시장의 반응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희망 공모가 밴드였던 26~28달러를 훌쩍 상회하더니 첫날 급등으로 시가총액이 상장 기준 184억달러에서 하루 만에 257억달러(약 39조8000억원) 수준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는 지난해인 2025년 투자 유치 당시 평가받았던 기업가치(145억달러)를 비웃는 성적표입니다.
이번 기업공개(IPO)로 벤딩스푼스가 손에 쥔 현금만 16억8000만달러(약 2조6000억원)에 달합니다. 올해 유럽 기업이 기록한 기술 IPO 중 단연 손에 꼽히는 규모입니다. 정보기술(IT) 업계는 한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미국 소프트웨어 상장 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1985년생 창업가 루카 페라리 최고경영자(CEO)는 성공적인 IPO로 단숨에 글로벌 억만장자 반열에 올라서게 됐습니다. 페라리는 벤딩스푼스 이전에도 창업 경험이 있습니다. 밀라노공대 재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첫 번째 스타트업 ‘에버테일(Evertale)’을 시작했죠. 사용자의 스마트폰 데이터를 기반으로 통화 기록, 촬영한 사진, 방문한 장소 등을 인공지능(AI)이 자동으로 분석하고 결합해 디지털 일기장을 만들어주는 앱이었습니다. 에버테일은 초기 대규모 투자까지 받으며 기대를 모았지만 3년 만에 파산했습니다.
페라리 대표는 실제 결제로 이어질 정도로 뚜렷한 매력이 없다는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했습니다. 이에 곧바로 2013년 남은 돈 4만달러로 ‘벤딩스푼스’를 창업했습니다. 그리고 에버테일의 실패를 거울삼아 비즈니스 모델을 180도 바꿉니다. 바닥부터 새로운 시장을 찾는 대신 이미 고객이 있는 서비스를 산 뒤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방식이죠.
참고로 벤딩스푼스라는 독특한 이름은 1999년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의 가장 유명한 장면에서 탄생했습니다.
주인공 네오가 저항군 캠프에서 만난 소년에게 “숟가락을 구부리려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오직 진실만을 깨닫도록 하세요. 사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요(There is no spoon)”라는 선문답을 듣는 장면입니다.
본질을 꿰뚫어보면 고정관념이라는 가짜 현실을 구부릴 수 있다는 이 철학에 매료된 페라리는 회사 이름을 아예 ‘숟가락을 구부리는 사람들(Bending Spoons)’로 지었습니다.
◆사모펀드와 닮았지만 ‘팔지 않는다’… 독특한 연금술 모델
투자자들이 이 회사에 돈을 싸들고 몰려간 이유는 벤딩스푼스만이 가진 독특한 사업 방식에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기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업을 사서 되파는 일반 사모펀드(PEF)도 아닙니다.
이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성장세가 꺾이고 관리가 안 되는 디지털 서비스를 싸게 산다→뼈대만 남기고 전부 고친다→그리고 영원히 보유한다.
벤딩스푼스는 에버노트, 비메오, 위트랜스퍼, 이벤트브라이트 등을 잇달아 인수한 뒤 방만했던 비용 구조를 칼질하고 제품 개발과 운영 방식을 자신들의 공통 플랫폼 시스템에 맞춰 완전히 재설계했습니다.
벤딩스푼스의 수많은 ‘수리 명단’ 중 시장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 단연 2022년 말 단행한 ‘에버노트(Evernote)’ 인수입니다.
에버노트가 어떤 서비스였습니까. 스마트폰 초창기, 전 세계 테크 엘리트들과 직장인들에게 ‘제2의 뇌’라 불리며 한때 기업가치 10억달러를 돌파했던 실리콘밸리의 상징이자 유니콘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습니다.
노션(Notion) 같은 트렌디한 협업툴(생산성 도구)이 치고 올라오고, 앱의 고질적인 무거움과 소프트웨어 오류가 방치되면서 에버노트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수년째 수백만 명의 사용자가 다달이 이용하고는 있었지만, 매년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죠.
벤딩스푼스는 인수 직후 무거운 ‘소프트웨어의 뼈대(아키텍처)’를 완전히 갈아엎었습니다. 십수 년간 방치돼 덩치만 커진 시스템을 쪼개고 가상 서버를 최신식으로 재구축했습니다.
인수 첫해에만 무려 75개가 넘는 대규모 기능 개선이 이뤄졌고, 앱의 고질적인 버그와 속도 저하가 해결되며 안정성이 30~50% 이상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구독료를 인상했죠.
이용자가 모두 떠날 수 있다는 시장 우려는 기우였습니다. 오히려 인수 당시 연 반복 매출(ARR) 1억달러 수준으로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에버노트는 벤딩스푼스의 손을 거친 지 단 1~2년 만에 캐시카우(현금창출원)로 거듭났습니다.
망한 앱 연금술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2023년 3억87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은 2025년 13억1000만달러로 3배 이상 폭발했습니다.
현재 벤딩스푼스가 확보한 월간 활성 이용자(MAU)는 5억명이 넘고, 다달이 돈을 내는 유료 고객만 900만명에 육박합니다. 낡은 브랜드들을 모아 거대한 ‘디지털 서비스 지주회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일각에선 “구조조정 공장일 뿐” 논란도
<7월1일 상장 당일 벤딩스푼스 주가흐름>
하지만 화려한 나스닥 데뷔의 이면에는 논란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장 큰 비판은 이들이 내세운 혁신의 실체가 결국 ‘가혹한 인력 감축’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벤딩스푼스가 기업을 인수할 때마다 피바람 부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뒤따랐고, 시장에서는 “본질적인 제품 혁신은 없고 비용만 쥐어짜내서 수익을 만드는 소프트웨어 공장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페라리 CEO는 이를 “위기에 빠진 기업을 되살리기 위한 전환의 대가”라며 정면 돌파해왔지만요.
또한 이들의 빠른 외형 성장이 자체적인 확대보다는 끊임없는 인수·합병(M&A)의 결과라는 점도 불안 요소입니다. 만약 경기 둔화가 찾아오고 인수 의존도와 부채가 발목을 잡는다면, 상장 첫날의 열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근본적인 위기는 ‘앱 산업’ 자체가 가진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생성형 AI가 기존의 전통적인 소프트웨어와 앱들을 모조리 대체해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합니다.
다만 벤딩스푼스는 이 거대한 위기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수한 낡은 서비스에 AI 기능을 접목하고 자동화를 적용해 ‘수익성 높은 캐시카우’로 부활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본격적으로 나스닥 시장에서 투자자의 냉철한 평가를 받게 될 벤딩스푼스는 과연 ‘앱 부활의 연금술사’라는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기 성과 후 성장 한계성이 명확한 ‘구조조정 공장’에 그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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