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의 오컬트 전사, '영원한 문학 청년' 헤르난 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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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하나에 소설책 한권쯤 거뜬히 담아내는 사람. 청춘의 어정쩡한 단면을 그리는 마이애미 기반의 화가, 헤르난 바스(47)다. 쿠바 이민자 2세이자 성소수자인 그의 작품 세계는 볼수록 기이하고 경이롭다. 혼란한듯한 색채가 조화를 이루고, 분산된듯한 세계가 하나로 수렴된다. 캔버스 가득 신비한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Hernan Bas_The hummingbird enthusiast(벌새 애호가), 2024

Hernan Bas_The hummingbird enthusiast(벌새 애호가), 2024

헤르난 바스는 쿠바 이민자 2세다. 미국 최남단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이던 아버지를 따라 플로리다주 북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마이애미를 기준으론 북쪽이었지만, 미국 대륙에선 최남단이자 아프리카 노예의 정착지였던 미시시피 인근엔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흘러 넘쳤다. 유령 이야기, 괴물 이야기, 외계인 이야기까지 밤새워 할 이야기가 많은 곳이었다. 6남매 중 한 명이던 그는 누나와 형들로부터 ‘진짜 그럴 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그 아이가 천착한 것은 회화였다. 초자연적인 요소를 고전 시가, 종교적 설화, 신화와 문학으로 엮어내며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구상 작가가 된 헤르난 바스를 지난 9일 서울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만났다. 2023년 12월 마이애미 바스 뮤지엄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개념주의자(Conceptualist)’에서 조우한 후 1년여 만이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이다. 신작 12점이 걸린 이 전시는 5월 31일까지 열린다. 그의 한국 개인전은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2021년 선보인 후 4년 만이다.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 을 찾은 헤르난 바스. (c)문덕관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 을 찾은 헤르난 바스. (c)문덕관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청년(혹은 미소년)의 표정은 대체로 무표정하거나 심드렁합니다. 어딘가 불편한 모습입니다.
인물은 항상 스토리를 반영해 그리려고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중간 단계 쯤에 있는 불확실한 상황, 과도기적 단계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연극으로 치면 인터미션(중간 휴식)이라고나 할까요. 이전 시리즈인 ‘개념주의자’에서는 유명인이나 다른 예술가를 오마주했다면, 이번 인물들은 남성 패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여성 모델과 달리 남성 모델들은 대체로 조금 어둡고 심드렁한 표정을 많이 보이니까요.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가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어딘가 본 듯한 오브제가 많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꿈 속을 헤매는 것 같은데요.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모두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벌새 애호가(The hummingbird entusiast)’를 보세요. 꽃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는 이 남자는 미국에서 실제 벌새를 유인하는 사람의 장면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상당히 미국적인 문화지만, 환상을 그린 게 아니라 현실에서 환상적인 장면을 포착한 셈이죠.

▷엄청난 수집가이기도 하죠. 빅토리안 시대의 장식, 머리카락으로 만든 소품 등 기괴하고 이상한 것들을 잔뜩 모았다고요.
별나고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나 장면은 현실에 존재하는데, 이런 것들을 발견했을 때 열정이 솟아납니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지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면 UFO나 괴물, 유령 이야기까지 마을에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형과 누나도요. 아! 요즘엔 세라믹으로 만든 ‘스파게티 푸들’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꼭 구하고 싶어요. 혹시 찾는다면 알려주세요.

'육발 고양이의 관리인(헤밍웨이 하우스)' 앞에 선 Hernan Bas. (c)문덕관

'육발 고양이의 관리인(헤밍웨이 하우스)' 앞에 선 Hernan Bas. (c)문덕관

Hernan Bas_The novice(yo-yo)_2025. 리만머핀 서울 제공

Hernan Bas_The novice(yo-yo)_2025. 리만머핀 서울 제공

▷모기장 모자, 요요와 같은 물건이 회화의 대상이 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아름다운데 기괴한, 블랙 유머같아요.
일상에서 발견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부조리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건과 물건에 매료됐어요. 플로리다 북부 모기가 가득한 울창한 늪지대에서 촬영한 사진엔 사람들이 얼굴엔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웃통은 벗은 채 헤매고 있었어요. (웃음) 플로리다 남부 키스(Keys) 지역에는 헤밍웨이 하우스 관리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희귀 고양이를 돌보는 일이에요. 하찮아 보이는 일 같죠? 하지만 이 고양이들은 헤밍웨이의 반려동물이 낳은 후손들이에요. 요요를 해본 적은 없지만, ‘세계 요요 챔피언십’에 나와 열정을 불태우는 청년들도 그래요. 평범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일들도 의미있는 장면이었어요.

▷하나 하나 스토리를 완성하고 그렸나요.
최근 들어 저는 100% 서사가 완성되면 그때 작업해요.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보내죠. 모든 장면이 머릿 속에 정리되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2주 정도 걸려요.(그의 작품은 가로 세로 2m가 넘는 대작들이 많다.) 우리 일상에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목록으로 적어봤어요. 그 사이에 하나가 ‘마술’이더군요. 생존엔 쓸모 없지만 기쁨을 주는 것들이죠. 그 경계를 주목했어요.

Hernan Bas_A needless moment(불필요한 순간)_2024. 리만머핀 서울 제공.

Hernan Bas_A needless moment(불필요한 순간)_2024. 리만머핀 서울 제공.

Hernan Bas _The pet psychic's dilemma(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_2024. 리만머핀 서울 제공.

Hernan Bas _The pet psychic's dilemma(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_2024. 리만머핀 서울 제공.

▷비과학적이고 미신같기도 한, 오컬트가 전체 주제의 한 축인 것 같은데요. 검정색 알을 낳은 암탉은 무슨 의미인가요.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에선 한 마리의 암탉이 갑자기 검은 알을 낳기 시작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를 상상했어요. 동물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직업인데, 하찮아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농장 주인에겐 중요한 사람이죠.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앉은 소년이 반쯤 열린 위자보드(Ouija Board)를 무릎에 올린 모습을 보세요. 죽은 자와 소통하는 도구로 알려진 심령대화용 점술판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생산되고 있어요.

▷남미와 북미, 전 세계의 문화가 공존하는 마이애미라는 지역이 영향을 줬을 것 같은데요.
7살 무렵 마이애미로 돌아왔고, 중간에 뉴욕과 디트로이트를 오가며 살았는데 지금은 다시 마이애미에 정착했습니다. 마이애미가 빠르게 도시화 되면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애증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마이애미는 인공적이면서 자연적인 도시죠. 거대한 관광 도시로 호화로운 것들이 넘쳐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원시의 자연과 만날 수 있어요. 혼재된 환경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건 분명합니다.

Hernan Bas (c)문덕관

Hernan Bas (c)문덕관

▷오스카 와일드, 샤를 보들레르, 프랑스 소설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등 문학 작품은 초창기부터 회화의 뼈대가 됐다고요.
30대 초중반까지는 문학으로부터 정말 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위스망스의 책 <거꾸로(Against Nature)>라는 책에 별난 수집가가 나오는 챕터가 있어요. 특이한 캐릭터의 로베르 드 몽태스키우라는 수집가가 등장하는데, 그 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은 논픽션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믿어지지 않는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니까요.

▷음악과 사진 등에도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영역에서의 예술 활동을 생각한 적은 없나요?
다른 미디어에 대한 시도도 많이 해봤지만, 언제나 회화로 돌아오게 되더군요.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리서치를 하거나 그림 그리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쏟고 있어요. 사색의 습관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낚시를 하는 거에요. 물론 잡은 물고기는 다 방생하지만요.

Hernan Bas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 . (c)문덕관

Hernan Bas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 . (c)문덕관

▷20대 때부터 수많은 컬렉터와 후원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는데, 지금까지 ‘성실한 화가’로서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 있나요.
고등학교 때 문학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선생님이 한 말이 있어요. “쓰레기 같아도 매일 써라”였어요. 뭐든 3년간 열심히 하다가 5년쯤 중단하고 다시 돌아온다? 결코 그때의 내가 아니에요. 8년 전의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에요. 지금도 20대 때 제 작품을 보면 스스로 "오 마이 갓"하고 외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매일 그립니다.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 지금이 전성기라고 생각하죠. 물론 운이 좋아서 루벨 부부와 같은 컬렉터를 일찍 만났지만, 그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 위대한 작품은 언젠가 누군가 반드시 알아줄 날이 있다고 믿습니다.

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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