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왈츠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한 표면적 배경으로는 민간 메신저에서 군사기밀을 다룬 ‘시그널 게이트’가 꼽힌다.
하지만 실제로는 왈츠의 전격 경질이 백악관 내에서 벌어지는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신봉자 그룹과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 그룹 간 권력 투쟁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국가안보 부보좌관으로서 왈츠를 보좌해온 알렉스 웡도 해임된 것으로 전해져 미국의 안보 컨트롤타워가 동시에 교체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의 대미외교 역시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왈츠가 1일(현지시간) 오전 8시경 폭스뉴스에 출연했음을 고려하면 왈츠는 최소한 이 시간까지는 경질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주요 매체들은 왈츠가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 세력인 ‘마가’의 비판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졌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사기밀을 민간 메신저 ‘시그널’ 채팅방에서 논의한 것이 그의 해임에 기폭제가 됐다는 것이다.
백악관 내부의 ‘마가’ 신봉자들은 왈츠가 지나치게 ‘매파’라는 점을 부각하며 공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NYT는 이란 핵 합의와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바라며 대외 개입에 회의적인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일하기에는 왈츠가 지나치게 매파라는 점이 대통령 참모 대부분의 인식이었다고 보도했다. 한 소식통은 왈츠에 대한 교체 논의가 지난 몇 주간 비공개로 진행돼 왔다고 NYT에 전했다.
왈츠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아래서 국방정책국장을 지냈다. 럼즈펠드 전 장관은 네오콘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과거 보수 진영의 주류였던 네오콘은 외교·안보에 적극적인 개입을 선호하며, 공화당 내에서 마가와 대척점에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백악관에는 마가 신봉자 그룹과 네오콘 그룹,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그룹 등 3개 파벌이 경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JD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천거했던 인물들이 마가 그룹에 속해있다. 네오콘 그룹에는 왈츠 전 보좌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이 있으며, 부유한 후원자로 구성된 올리가르히 그룹으로는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이 꼽힌다.
WP는 이 같은 3각 구도가 때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최근 행정부의 이념적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에서 긴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WP는 이어 최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최측근 보좌관 3명이 해고된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군사력 남용·해외분쟁 개입에 대한 회의론이 반영된 마가의 시각을 공유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헤그세스 역시 매파에 속하며, 국방정책에 있어서는 마가의 비판자로 꼽힌다.
헤그세스가 시그널 게이트 당시 채팅방의 일원이었고, 이후 가족·친지들에게 군사기밀을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감찰을 받고 있는 만큼, 그의 입지 역시 불투명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왈츠의 경질 배경에는 백악관의 ‘최고 실세’로 꼽히는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과의 갈등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왈츠가 와일스 실장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왈츠의 경질로 한국의 대미 외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왈츠는 한국·일본·호주 등과의 관계를 강화해 중국에 대응해야 한다는 대표적 ‘동맹파’로 꼽혔다. 이에 안보보좌관 선임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마가’와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는 국가안보보좌관 발탁 이전에 한국을 찾아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는 등 한미동맹을 중시해왔다.
함께 해임된 알렉스 웡 국가안보 부보좌관도 트럼프 행정부 1기에서 북한 문제를 담당해왔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 경질로 백악관의 ‘지한파’ 2명이 모두 물러나게 된 셈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25일 백악관을 찾아 웡과 면담하기도 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을 겸직하게 된 루비오 장관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이후 처음으로 국가안보보좌관·국무장관을 동시에 맡게 됐다.
미국 언론에서는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겸임했던 ‘키신저의 실험’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국가안보보좌관은 국무부와 국방부, 정보기관 간의 상반된 주장을 조정해야 하는데, 국무장관 입장에서는 이 같은 조율이 수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인 1973년부터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겸직했고,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인 1975년 국가안보보좌관에서 해임됐다. 특히 루비오 장관이 4개 기관을 맡은 상황에서 업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왈츠의 후임으로 위트코프 특사와 스티븐 밀러 백악관 정책 담당 부비서실장, 서배스천 고카 NSC 부보좌관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밀러와 고카는 ‘강성 마가’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에는 모두 4명의 안보보좌관이 임명됐다. 초대 인보보좌관인 마이클 플린은 안보보좌관 내정자 신분으로 러시아 측을 만난 사실이 드러나 결국 25일 만에 사임했다. 플린의 후임인 허버트 맥매스터는 트럼프 대통령과 성격 및 정책적 차이로 갈등을 빚다 약 13개월 만인 2018년 4월 트위터로 해고됐다.
그 뒤를 이은 존 볼턴도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 등 주요 외교 정책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충돌했고, 2019년 4월 경질됐다. 네 번째 안보보좌관인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