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교두보의 위기[임용한의 전쟁사]〈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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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남침을 했을 때, 북한은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부산에서 김일성이 직접 참석한 채 통일 기념식으로 치르려는 구상이었다. 유엔군 참전으로 이 계획은 불가능해졌다. 북한 당국은 8월 15일 이전에 대구라도 점령하라는 명령을 군에 내렸다. 이때부터 9월 초순까지 북한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마산, 창녕·영산, 다부동, 포항 전투 등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이 이어졌다. 북한군의 진격이 조금만 빨랐거나 어느 한 중대라도 거점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지고 미군이 철수해야 했을 위기를 열 번도 더 겪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전선의 병력은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우위였다. 융단 폭격을 감행할 만큼 제공권도 장악하고 있었고, 화력에서도 크게 앞섰다. 반면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동안 막대한 희생을 치러 병력과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전차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남한에서 징발한 보충병이 적지 않았다. 이런 전력 차이에도 낙동강 방어선은 쉴 새 없이 위기를 맞았다. 기적에 가까운 운으로 모면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는 공세의 주도권을 북한군이 쥐고 있었던 탓이다. 수비 측 병력이 몇 배 많더라도 공세하는 측은 원하는 지점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다. 유엔군도 ‘킨 특임대’를 편성해 반격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훈련 부족으로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군은 공세를 해도 도로를 점령할 뿐이었다. 공격이 없는 방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격과 방어의 구분은 전략적 목표의 차이일 뿐이다. 이번 한미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FS)’에서 공세 훈련이 빠졌다. 우리 군사력이 우월하고, 우리의 목적은 방어이니 공격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방어가 목적이라고 해서 방어만 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임용한의 전쟁사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특파원 칼럼 A Farm Show-창농·귀농 고향사랑 박람회 마음처방 임용한 역사학자©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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