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순수 한국인 최초 발굴… 경주 호우총 아닌 개성 법당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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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주장
“고려 벽화고분군인 법당방 발굴 때… 한국인이 기획-수행 전부 도맡아
호우총 발굴은 일본 학자가 주도”

1947년 5월 법당방 발굴 당시 동쪽 벽의 그림을 촬영한 유리건판. ‘촬영자 이건중, 조사자 김원룡·이홍직’으로 기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47년 5월 법당방 발굴 당시 동쪽 벽의 그림을 촬영한 유리건판. ‘촬영자 이건중, 조사자 김원룡·이홍직’으로 기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유적 발굴은 거의 일본인들이 독점해 이뤄졌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이뤄진 첫 유적 발굴’로는 일반적으로 1946년 경북 경주 호우총 발굴이 꼽힌다. 그런데 호우총이 아니라 1947년 고려시대 벽화고분군인 법당방(法堂坊) 발굴을 시초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5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에서 열린 중부고고학 정기학술대회에서 “한국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기획하고 수행한 최초의 발굴은 국립박물관 주도로 이뤄진 법당방”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법당방은 판문점에서 개성 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경기 장단군 진서면의 벽화고분군이다.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김원룡 제2대 국립박물관장과 장욱진 화백 등이 참여해 십이지신상과 고려 귀족이 그려진 벽화를 조사했다.

강 교수가 ‘고려벽화고분발굴기’(1954년)와 ‘한국 박물관 100년사’(2009년) 등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법당방 발굴 조직도 및 일정에 따르면 발굴 작업은 1947년 5월 1일부터 21일간 일본인이나 미국인 없이 한국인으로만 진행됐다. 국립박물관 소속 이홍직이 총지휘를 했고, 직원이었던 김원룡이 기록을 맡았다. 동양화 전문가 임천과 장욱진은 벽화 모사를 담당했다.

반면 호우총은 일본인 학자가 발굴을 주도했다는 게 강 교수의 시각이다. 강 교수는 “호우총에선 조선총독부 출신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당시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의 스승으로서 사실상 발굴을 주도했기에 탈식민화된 한국 고고학의 시작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법당방 발굴을 계기로 우리 고고학 인재 양성이 본격화했다는 의미도 부여했다. 강 교수의 발표문 ‘해방공간 북녘 중부지역의 고고학 연구와 개성학파’에 따르면 법당방 조사자 대부분이 발굴 이후 ‘개성학파’의 맥을 이으며 박물관과 대학에서 고고학 인력을 양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진홍섭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분단 이후 한반도 중부 지역이 금단의 영역이 되고, 신라 고고학이 주류를 차지하는 동안 개성학파의 이름이 학계의 기억에서 지워지면서 법당방 발굴의 의미가 반쪽이 됐다”고 봤다.

법당방 조사 성과는 공공적 행사로 이어졌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됐다. 발굴 직후 국립박물관은 특별전을 열고 법당방 벽화 사진과 모사도를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반론도 적지 않다. 이기성 한국전통문화대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이날 토론에서 “법당방 벽화고분 조사는 호우총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과 비교해 미술사 연구에 가깝고, 호우총 발굴 조사 과정도 영화로 촬영 및 상영되며 공공적 요소를 갖췄다”며 “법당방 발굴도 중요하지만 호우총 발굴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배기동 한양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도 “호우총 발굴보고서와 김재원 회고록 등엔 당시 아리미쓰는 지도위원일 뿐, 전체 지휘와 기획은 김재원이 주체적으로 맡았다고 명시돼 있다”며 “최초의 발굴은 호우총이 합당하며, 법당방은 ‘첫 기술자립형 발굴’”이라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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