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123사비공예마을에 들어서자 오래된 골목 사이로 공방과 작은 상점들이 이어졌다. 골목 끝에 자리한 123사비창작센터에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였다. 공예를 배우고 정원을 걸으며 지역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부여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는 사람들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한 ‘2026 공예주간’의 부여 행사가 이날부터 열흘간 펼쳐졌다. 이 가운데 기자가 참여한 ‘제철을 짓는 공예 런케이션’은 공예와 숙박, 지역문화를 결합한 체류형 프로그램이었다. 런케이션은 배움을 뜻하는 ‘런(Learn)’과 휴가를 뜻하는 ‘베케이션(Vacation)’을 합친 말이다. 2018년 시작돼 아홉 번째를 맞은 공예주간은 전국 53개 도시에서 열렸으며, 올해는 부여가 거점도시였다.

● 쇠퇴와 재생이 포개진 규암
부여 규암면은 처음부터 공예마을은 아니었다. 백제 문화유산이 밀집한 부여읍에서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이곳은 한때 나루터와 오일장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백제교가 놓이면서 생활권이 강 건너 부여읍으로 이동했고, 마을에는 빈집과 빈 상가가 늘어났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젊은 공예가와 기획자들이 하나둘 들어오면서 오래된 마을은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규암마을을 걷다 보면 쇠퇴와 재생의 시간이 한 풍경 안에 겹쳐 있다. 백마강 둑을 따라 길게 난 도로 주변에는 오래된 한옥과 낮은 상가가 드문드문 남아 있다. 겉모습은 낡았어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책방과 공방, 카페와 숙소가 오래된 벽과 들보를 품은 채 저마다 쓰임을 이어간다.

부여군은 이 흐름에 공예를 더해 123사비공예마을을 조성하고 마을의 공방을 지원해 왔다. ‘123사비’라는 명칭에는 123년에 이르는 사비 백제의 역사를 바탕으로 공예인의 손길을 통해 마을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다. 123사비창작센터와 레지던스는 청년 공예가에게 작업실과 숙소를 제공하고,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트큐브에서는 전시와 판매가 이뤄진다.

● 정원의 제철, 공예의 결
런케이션 첫날, 규암의 ‘스튜디오 부여’에 모인 참가자들은 정원과 공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정원과 공예는 얼핏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닮았다. 손을 쓰고, 재료의 성질을 살피며, 기다려야 한다. 정원에도, 공예에도 제철이 있다.

부여에서 공예의 시간을 깊이 느낀 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금동대향로 전시 공간이었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이곳은 금동대향로 한 점에 오롯이 집중하도록 구성돼 있다. 궁남지의 연꽃을 본 뒤 이곳에 들르니, 금동대향로가 부여의 자연과 신화를 품은 작은 우주처럼 보였다.

박물관 밖에서도 부여의 시간은 이어졌다. 런케이션 참가자들과 함께 백마강 물억새 군락지를 걷고, 마을 정원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오래된 것을 밀어내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조심스럽게 얹는 부여의 태도가 우아하다고.

지역 공예가와 함께 이끼볼을 만드는 체험도 했다. 흙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둥근 형태를 다듬자 같은 재료로도 저마다 다른 이끼볼이 만들어졌다. 공예 체험의 의미는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작은 물건 하나에도 재료를 살피고 힘을 조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아갔다.

1박2일 동안 식사는 정원과 음식문화를 이어 온 ‘가평별서’가 맡았다. 부여의 통들깨와 사과를 더한 앤다이브 샐러드, 부여 햇완두콩을 올린 브루스케타, 부여 쌀에 버섯 쌈장을 곁들인 케일 쌈밥, 들녘의 쑥으로 만든 어르신의 쑥개떡…. 저녁 뷔페와 다음 날 유럽식 아침, 점심 도시락으로 이어지는 ‘제철 밥상’ 덕분에 부여의 초여름이 맛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지역 축제가 성공하려면 오래된 공간을 잠시 빌려 화려한 장면을 만든 뒤 떠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공예가의 작업과 상점, 숙박과 음식, 정원과 강변이 일상의 생태계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방문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지역과 관계를 맺게 된다. 사람이 머물고 손을 보태며 다시 찾아오는 시간이 쌓일 때, 부여의 다음 계절도 천천히 무르익을 것이다.

부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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