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겨울 관광] 원주의 비밀스런 명소, 3대 폐사지
법천사지 국보 101호 지광국사탑… 화려한 조각-장식이 주는 웅장함
거돈사지 산자락 아래 포근한 빈 터… 흥법사지 상처를 어루만지는 고독함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부는 시기가 왔다. 어느새 다가온 연말은 공허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휘청거리기 쉬운 때이다. 이럴 땐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내면의 여백을 허락하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심의 소음을 떠나 자연과 역사 속에서 나에게 빠져들 수 있는 완벽한 여행지가 있다. 》
차를 타고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도로가 혼자만의 것처럼 느껴진다. 고요한 시골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면 나만의 시간이 열린다. 가는 길에서부터 설렘을 안고 도착한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유적전시관. 이곳에 국보 101호인 지광국사탑이 있다.
고요해야 들을 수 있다
고려시대 문종(재위 1046∼1083)은 국사를 지낸 원주 출신 해린(海麟, 984∼1070)이 법천사로 돌아와 입적하자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과 탑비를 세우도록 명했다. 자그마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고려 선종 2년(1085)에 승탑이 완성됐고 그 자체로 역사의 상징이 됐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유적전시관을 나오면 법천사가 자리했던 터전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한때 활기찬 신앙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이 고요히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광국사탑과 한 쌍을 이루는 지광국사탑비(전체 높이 4.55m)가 기다리고 있다.
원주에는 법천사지처럼 번창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폐사지(廢寺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법천사지를 나와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1000년 수령에 7m가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절집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본 수문장이다.
그 옆으로 잘 다듬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거돈사지를 만난다. 거돈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돼 고려시대에 화려한 꽃을 피웠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유산 답사의 교과서 같았던 유홍준 교수의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8권 ‘남한강편-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에는 ‘남한강변 폐사지 답사는 거돈사부터 가야 제격’이라고 쓰여 있다. 그럴 만한 것이 깊숙한 산자락 아래 7500평 정도의 빈터가 포근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또한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바로 뒤에 금당터가 있고 원공국사탑과 탑비 같은 보물이 남아 있다.흥법사지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곳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자취만 남아 있다. 흥법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 융성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신성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고독한 자태다. 휑하고 허전한 느낌이 울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고즈넉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원주 3대 폐사지(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는 흙과 돌이 됐지만 단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지나간 세월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폐사지에서 불심(佛心)을 깨닫지는 못해도 내면을 채우는 시간이 됐다.저물어야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 마지막 장소로 이동했다. 부론면 흥호리의 흥원창(興元倉)이다. 일부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쯤으로 맞춰 갔다. 노을 명소, 아름다운 일몰, 캠핑 명소, 자전거 타기 좋은 곳, 걷기 좋은 곳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원주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비밀스러운 명소에서 나를 마주했던 시간,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본질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얻어간다.
고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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