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eSIM)은 먹통에 현금도 없고 여러모로 ‘우당탕탕’이었지만, 내공이라면 내공인지 괜찮았다.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아니라, 뭐가 됐든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한 데서 오는 여유였다. ‘중경삼림’의 촬영지였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하자 영화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 12년 만에 다시 본 레이저쇼는 더 이상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대신 큰 정보 없이 찾아간 식당에서 인생 최고의 베이징덕을 만났다.
이튿날은 늦잠을 잤다. 출근도 육아도 없으니 여기에서만큼은 일단 나를 좀 재우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마카오로 향했다가 바글거리는 인파를 피해 도망치듯 복귀했다. 저녁을 먹으러 헤매던 중, 마치 홍콩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야장이 불쑥 나타났다. 볶음면 하나, 맥주 한잔이 그 어떤 만찬보다 황홀했다.
다음 날은 무작정 트램에 올랐다. 목적지 없이 남은 정거장 수에 조급해하지 않고 원 없이 풍경을 누렸다. 귀국일 아침 마지막 식사를 하러 차와 간단한 음식을 주는 차찬텡에 갔다. 주문 실수로 3인분은 될 듯한 양이 나왔고, 이를 지켜보던 노부인이 나서서 주문을 확인해 주면서 통성명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기에 이르렀다. 대화 말미에는 번호를 주고받으며 나의 다음 홍콩 여행을 기약했다.짧은 여행이었다. 쇼핑도, 대단한 관광도 없었고, 이렇다 할 맛집도 찾아간 적 없었다. 그저 여행 내내 ‘중경삼림’ OST인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만 지겹도록 들었다. 문득 영화의 탄생 비화가 떠올랐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당시 무협 대작인 ‘동사서독’을 찍고 있었는데 촬영이 지연되면서 뜨는 시간이 생겼다. 이때 기분 전환 겸 거리에 나가 23일 만에 가볍게 찍은 것이 바로 이 영화였다. 대본조차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자유로운 연출은 빛을 발했고, ‘중경삼림’은 희대의 명작으로 남았다. 재밌는 것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동사서독’은 흥행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다만 여행에서 피어난 감상 속에 한 줄을 덧대어 본다. 나는 어떻게든 또 길을 찾을 것이라고. 잘못 든 길에서 뜻밖의 야장을 만나듯, 주문 실수로 멋진 인연을 만나듯, 가볍게 찍은 영화가 명작이 되듯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 때로는 더 근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게 어떤 길이든 분명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뭐가 됐든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돌아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의 집으로.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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