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진상 [맛있는 중고이야기]

7 hours ago 3

ⓒ ODRI  A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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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크기는 고정돼있다’ 란 문장이 떠오른 건 이사 먼지 가득한 방 앞에 섰을 때였어요. 동굴처럼 아늑한 방을 보자 그리스의 이 악명높은 강도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의 침대 길이와 잠이 든 여행자의 키를 가늠해보는 모습이 그려졌죠. ‘어쩌면 신화 속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들이 비난하듯 원래부터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침대 길이는 정해져 있으니 그의 머리 속에는 여행자의 다리를 자르거나 잡아 늘이는 두 가지 방법만 있었을 뿐, 여행자와 앉아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같은 건 하지 못했던 거야. 그것이 업보일 수도.’

그 몇 주 전, 나는 오피스텔에서 월세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후배에게 침대를 사주겠다고 호기롭게 약속했고 당근마켓에서 마음에 쏙 드는 아르데코 스타일의 프레임을 발견해 좋은 가격으로 거래를 완료했으며 이사 당일, 단골 용달차 기사님으로부터 침대 판매자의 집에 막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참이었어요. 후배는 침대가 들어오면 아파트가 확 살아날 것 같다고 나만큼이나 흥분해 있었습니다.

막상 침대가 들어갈 그 집의 유일한 방을 보니 ‘크기가 고정된’ 침대를 집어 넣으려면 벽을 200cm쯤 거실로 밀어내야한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앞이 뿌연 건 먼지 때문이 아니라 나의 충동 거래로 인한 결과가 홀로그램처럼 오버랩됐기 때문일 겁니다. 인생을 반쯤 살고 나서야 침대란 침실 방문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하고, 침대의 길이는 침대의 헤드와 매트리스를 더한 것임을 깨닫다니.

프로크루스테스 식 파국을 막기 위해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에겐 취소 즉, 무르기의 세계가 있잖아요. 한편으론 아파트 밖에 침대를 내놓고 즉시 ‘재당근’을 하겠다는 ‘플랜B’도 세웠고요. 판매자는 예상대로 당황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지금 과거 거래 평가를 보니 거래 취소는 처음인 거 같네요. 그쪽도 곤란하시겠어요. 취소해드릴게요.”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심으로 알게 된 순간, 진심을 전하느라 감히 전화를 끊지도 못했어요. 용달차 기사님에게 편도 운송비를 보내고 후배에겐 싱글 침대를 선물하는 것으로 거래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어수선한 꿈처럼요.

며칠 전 저는 프로크루스테스의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났어요. 몇 달 전 중고거래앱에 올려놓은 캣타워의 거래 당일, 물품을 분해하고 청소하고 부분별로 포장해서 아파트 1층으로 옮겼습니다. 시간에 맞춰 승용차가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부부와 나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어요. 그러나 포장한 캣타워를 본 부부의 걸음이 갑자기 느려졌고 다가오는 네 개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머뭇머뭇 캣타워 박스를 차에 실으려는 남편 옆에서 “이렇게 클 줄 몰랐는데, 꼼꼼히 사이즈를 봤어야 하는데, 집에 놓을 수가 없을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아내는 울상이 되었어요. 중고거래가 성사되자마자 새 캣타워를 주문한 내 입장에선, 분해한 캣타워를 다시 건설한다는 건 신축 옆에 헐었던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거래 취소는 불가’라는 판매 조건을 내밀어야 했지요. 구매자가 부르는 대로 가격을 협의해 물품값도 받았거든요.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캣타워가 클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야 했을까요(대개 처음 캣타워를 설치하면 크기에 당황합니다). 나는 잠시 구매희망자의 거래평을 일람했어요. ‘친절한 분’ ‘나눔에 감사’ ‘늦은 밤 거래물품을 갖다주셨어요’ 등등. “곤란하시면 거래 취소해드릴게요. 어차피 캣타워 분해해서 포장 해둘 거여서 큰 문제는 없어요.”

부부는 세상 걱정거리를 내려놓은 표정과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진심’은 진짜였을 겁니다. 하하. 요즘 중고마켓에서 일방적으로 거래취소를 하고 연락을 끊는 거래자들이 늘어 신고글을 종종 봅니다. 당연하게도, 중고거래자들은 ‘거래 취소’를 최고의 비매너, 일명 ‘진상’으로 꼽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번거로움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정을 공감하고 ‘거래 취소’에 동의한 이웃들을 떠올립니다. 우리에게 ‘진심’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요. 하지만 구매와 판매의 결과는 결국 개인에게 돌아갑니다. 인생의 모든 선택처럼요.

@madame_carrot 당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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