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호텔&리조트 ‘솔비치 남해’ 5일 개관
다랑이 형태 빌라-전 방향 바다가 보이는 호텔
남해와 이탈리아 포지타노 느낌 안팎으로 물씬
‘아득히 푸른 바다 구름 끝에 세 섬이 있으니(蒼茫三島海雲邊)/방장산 봉래산 한라산이 가까이 잇달아 있구나(方丈蓬瀛近接聯)’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1637∼1692)은 생의 마지막 3년을 지금의 경남 남해군 상주면 노도(櫓島)라는 섬에서 보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지 집을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싸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 귀양 생활이었다. 외롭고 답답한 그는 노도에서 바라본 먼바다 섬들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으로 여기며 버텼을 터다.
》호랑나비인 듯, 아이 안은 엄마인 듯
노도에서 배를 타고 벽련마을로 나와 차로 10여 분 동남쪽으로 가면 남해 최남단 미조(彌助)면이 나온다. 조선 시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미륵불의 도움을 구한다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전한다(‘남해 유배지 답사기’, 박진욱 지음, 알마, 2015).
바다뿐만 아니다. 유인도인 호도(虎島·범섬) 조도(鳥島·새섬)와 사도(蛇島·뱀섬) 장도(獐島·노루섬) 팥섬 콩섬 율도(栗島·밤섬) 미도(米島·쌀섬) 같은 무인도가 앞다퉈 다가오는 듯한 장관도 한눈에 들어온다. 옥색과 청록색이 어우러진 바다에 점점이 앞뒤로 가까이 늘어선 섬들이 산맥처럼 겹쳐 보인다.
》남해와 포지타노를 품 안에
그 끝에서 남해를 360도 조망할 수 있다. 북쪽 저 멀리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금산이 보인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축소해 가져다 놓은 듯한 암벽들이 우뚝하다. 하늘길 끝에는 ‘하늘 그네’가 있다. 밧줄이 아니라 철제 파이프가 전기 동력을 이용해 그네를 창공으로 밀어 올렸다가 내렸다 한다. 탄성과 비명이 적절히 섞인 소리가 탄 사람 입에서 터져 나온다.
차를 타고 50분가량 서쪽으로 달리다 앵강만을 낀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천마을 다랑이 논’이 나온다. ‘다랭이 마을’이다. 가천마을 산비탈은 가파르다. 경사가 45도쯤 된다. 바닷가에 있지만 암초투성이여서 배를 댈 만한 곳이 없다. 애당초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할 형편이 안 됐다는 얘기다. 먹고 살기 위해 산비탈을 개간했다. 논배미를 만들려고 다랑이마다 돌로 축대를 쌓았다. 마을 뒤 응봉산과 설흘산에 있는 많은 돌을 아낙들이 다 날랐다.
‘하동 사람은 황소를 아내처럼 이해하고, 남해 사람은 아내를 황소처럼 부려 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남해 여성들이 억척같이 일했다는 말이다. 부산 같은 데서는 ‘남해 여자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다랑이가 외지인이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피땀이 서려 있을 터다.
이곳 다랑이는 지형상 천수답이다. 마을 양쪽으로 두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흐르지만 역부족이다. 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 이름 가천(加川)은 ‘냇물을 더하다’라는 뜻이다. 물을 염원하는 비보(裨補) 사상을 담았다. 논의 폭이 좁다 보니 모내기나 벼 베기도 기계를 쓰지 못한다. 논에 물을 댈 때 층층이 흘러내리는 물에 햇볕이 반사돼 반짝이는 장면은 윤슬 저리 가라다.
가천마을에서 서쪽 바다로 눈을 돌리면 앵강만 초입에 노도가 보인다. 배 젓는 데 쓰는 노를 만드는 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저 섬에서 서포 김만중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희구하다 풍토병으로 쓰러졌다. 햇빛 찬란하고 모래밭 새하얀 남해를 둘러본다. 글쎄, 이미 우리는 그곳에 와 있지 않나. 비록 며칠 안 되는 휴가만이라도 말이다.
글·사진 남해=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