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있던 애국지사의 사진은 어떻게 밖으로 새어 나갔나 — 1926년 ‘박열 괴사진 사건’[청계천 옆 사진관]

6 days ago 23

백년사진 No. 180 ● 내 손을 떠난 사진세상을 뒤흔드는 사진은 대체 어떤 경로로 외부에 유출되는 걸까요? 기념하기 위해서 또는 SNS에 자기 자랑을 위해서 올린 사진이 때로는 의도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되면 권력을 흔듭니다. 내 손을 떠난 사진은 또 다른 사실을 증명하게 되면서 정치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 100년 전, 감방에서 찍힌 한 장여기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깨끗한 옷을 차려 입은 여성이 남성의 몸에 기대어 책을 읽는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남성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카메라를 편한 모습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이 100년 전 일본 정계와 한반도를 뒤흔든 ‘괴사진(怪寫眞)’입니다. 1927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법정에서 포옹한 박렬의 부처>. 사진 속 여성은 1926년 7월 사망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 박열(朴烈)과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입니다. 두 사람은 1923년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 당국에 의해 대역(大逆)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붙잡혔습니다. 1926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열흘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런데 격리 수감돼 있어야 할 두 미결수가 나란히 앉은 이 사진이 세상에 흘러나오면서, 일본 사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일본의 입장에서는 ‘대역죄인들’의 사진이 어떻게 촬영되었고 어떻게 밖으로 새어 나갔던 것일까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판사였다놀랍게도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두 사람을 취조한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立松懐清)였습니다.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박열과 후미코의 예심을 맡았던 인물입니다.1926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그의 해명이 실렸습니다. 당시 지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그 사진은 작년 (1925년) 사월 구일에 박은 것이외다. 취조가 끝난 것이 사월 칠일이었는데, 그 이튿날 박렬이가 자기 형에게 보낸다 하므로 박은 것이며, 아무리 대역 범인이라고는 말할지라도 형제간까지 죄가 있을 리치가 없겠지요. 나는 다만 인간애로 박았을 뿐이오, 결코 다른 사람에게 그 사진을 준 일은 없습니다.”형에게 보낼 사진을, 인간적인 정으로 찍어주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측 자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테마쓰가 격리돼 있어야 할 두 사람이 한자리에 있도록 편의를 봐준 뒤 직접 사진을 찍었다고 전합니다.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열이 어머니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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