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비오 개인전 《TIME INTERFACE》 개최
우주와 시간을 새긴 상형문자와 교감하다
수행하듯 빚어내는 시간과 에너지의 조감도
서울숲 더페이지갤러리서 5월 30일까지
추상적인 듯 추상적이지 않은 시간 추적자, 포털을 그리다
사랑의 문장을 적은 종이를 태운 뒤 그 재를 물감에 섞어 화면 위에 흘려 보낸다. 얼룩과 흔적은 시간과 물질, 감정이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이 끝나는 시점을 미리 정한 뒤, 그 시간을 좌표로 밑그림 없이 한 번에 기호를 그려나가기도 한다(작품 《TIME SIGNALS: Marks(Chronoglyphs)》).
물감은 허공에 던져지거나 흘려 보내지고 중력과 재료의 물성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최비오 작가의 작품은 마치 ‘시간을 새긴 기호(Chronoglyph)’처럼 보인다.
한국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해온 최비오 작가는 이번 전시를 ‘Time Signals’라는 이름 아래 묶었다.《TIME SIGNALS: Respons-es(Tempo Code)》 연작부터 들여다 보자. 작업에 앞서 작가는 캔버스 뒤에 작업을 시작한 날짜와 시간, 서명을 적는다. 이 행위는 작업의 출발점을 표시하는 과거의 질문으로, 이후의 작업 행위는 바로 이에 대한 응답(‘Responses’)이다.
캔버스 위에는 0과 1들이 배열되고, 그 위에 선과 기호가 축적되면서 작품은 복잡한 기계 설계도처럼 변한다. 실버(silver), 코퍼(copper), 블랙(black) 등 서로 다른 바탕의 색을 가진 회화는 관람자의 위치와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표면을 드러내며 시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여기서 0과 블랙은 ‘꺼짐’을, 1과 실버는 ‘켜짐’을 의미한다.
작가는 단순히 작품 속에 시간을 재현하는 대신, 작업의 시작과 종료 시점, 재료의 물성, 신체의 행위, 우연의 개입을 통해 그가 받아들인 ‘시간의 흔적’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재가 된 문장, 과거를 기록한 서명, 물감의 중력. ‘시간’은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기록한 작가의 작품은 절대 추상적이지 않다.
미래는 와있고 우린 연결돼 있다
최비오 작가는 자신이 감지한 보이지 않는 시공간의 진동을 리드미컬한 선과 추상 기호로 캔버스와 공간 속에 표현해내는 작가다. 그의 작업은 우주와 인간, 물질과 감각이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마치 포털처럼 하나의 장(field)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동양적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상업 작가였던 그는 어떻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을까.
작가는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세계 최초 리듬 게임 PaRappa the Rapper의 아트디렉터로 알려진 로드니 앨런 그린블랫(Rodney Alan Greenblat)에게 시각 언어에 대한 독창적인 감각을 배웠다. “그분께 어떻게 작가로 살아남아야 하는지 많이 배웠죠. 상업적인 디렉터로서도, 작가로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최비오 작가)
그의 작품 《TIME SIGNALS: The Silver Answer》를 들여다 보자. 화면 위에 반복되고 중첩되는 선과 기호들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거나 사물을 평면에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의 흐름이 머무르고 기록되는 흔적으로 기능한다. 속도감 있게 휘감는 선들과 원초적인 기호들은 무한한 공간 속을 유영하듯 미지의 세계를 기록한다.
마치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그려진 그림이랄까. 그의 그림이 지도처럼 혹은 고대의 상형문자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기호처럼 느껴지는 그의 언어 속에서 시간은 찰나와 영원을 넘나들며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우주와 개체가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에 기반한 그 작품들은 만물에 대한 경외와 기원의 마음을 담고 있다.
물리학이 설명하지 못한 우주의 상수, 137과 교감하는 관객들
갤러리 중앙에 놓인 관객 참여형 작품 《137 Silent Observers》를 들여다 보자. 137개의 자연석이 137×137cm의 알루미늄 판 위에 놓여 있다. “137은 세상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설명하는 특별한 숫자입니다.”(최비오 작가) 상수인 137이라는 숫자는 추상적 상징에 멈춰 있거나 박제되지 않고, 관객과 함께 작업 전체를 능동적으로 직조해낸다.
관람객들은 135개의 흰 돌 중 하나를 골라, 위치를 바꾸고 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다(관객들은 작가가 태초에 내려놓은 2개의 은색 돌은 손대지 않는다). 참여객의 이름은 나중에 그림 뒤에 붙여진다. 작가는 137초마다 한 번씩 이 이동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영상으로 만든다. “전시장 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 역시 137초에 맞게 제작되도록 했어요.”(최비오 작가)
보이지 않는 신호와 감각의 진동, 기록과 응답, 관찰과 참여가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설치, 영상까지 전이된 작가의 그림은 고정된 이미지를 담는 평면을 넘어선다. 전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관객들의 참여 과정은 비디오로 기록돼 영상 작업 《137 Pulses》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다시 《Tempo Code: Initial Condition》 그림으로 옮겨 간다.
설치, 기록, 영상, 회화가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루는 것. 작가의 의도, 관객의 선택, 시간의 흐름과 재료들의 물성, 사운드와 공간 전체가 어우러지며 작가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시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게 되는 것이다. 2022년 더페이지갤러리에서의 개인전 《Observer》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TIME INTERFACE》전은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Biography
1971년생.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School of Visual Arts)에서 대학원 석사과정(MFA)을 취득한 이후 뉴욕 맨하튼에서 수년간 활동했다. 독일 아트 카를스루에(2022), 스콥 마이애미 비치(2021), 컨텍스트 아트 마이애미(2019) 등 국제 아트페어에 다수 참가했으며, 독일 헤펜하임 미술협회의 초청 개인전(2017), 베니스 비엔날레 팔라초 뱀보 특별 초대전(2019)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SK 행복나눔재단, 우란문화재단, 서울대학교 보라매병원 등에서 영구 소장 중이다.
[최비오 개인전 《TIME INTERFACE》]
전시 기간: ~2026년 5월 30일(토)
전시 장소: 더페이지갤러리 EAST관(서울시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글 박찬은 기자(park.chaneun@mk.co.kr)]
[이미지 더페이지갤러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30호(26.05.1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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