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982년 OB 베어스의 박철순(72)이 기록한 22연승이 있었다. 박철순은 4월 10일 전주 해태전 구원승을 시작으로 9월 18일 대전 롯데전까지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역사적인 22연승을 달성했다. 9월 22일 롯데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4로 패하면서 연승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박철순은 그 경기에서도 정규이닝인 9회를 넘어 10회까지 던지다가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원년 박철순의 피칭은 여느 투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왼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던졌고 변화구로는 체인지업, 너클볼, 팜볼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상대 타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휘황찬란한 박철순의 투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럴 만도 한 게 박철순은 196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원국에 이어 한국 투수로는 역대 두 번째로 미국프로야구를 이미 경험한 선수였다. 박철순은 1980년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해 두 시즌 동안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박철순은 “당시 한미대학야구선수권이라는 대회가 있었다. 볼티모어 구장에서 당시 마이너리그 연합팀과 경기를 했는데 그날따라 공이 제대로 긁혔다. 시속 150km를 던졌는데 동양인이 빠른 공을 던진 게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계약금 2만 달러를 받았다. 요즘 기준으로는 헐값이지만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첫해 싱글A에서 머물던 박철순은 이듬해 더블A로 승격했다. 때마침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창설되면서 박철순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는 기본 변화구인 슬라이더도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미국에서 다양한 구질을 배웠던 박철순이 던지는 체인지업과 팜볼 등은 한국 타자들이 보기에는 마구와 다름없었다. 박철순은 결국 그해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소속팀 OB는 그해 한국시리즈 정상에도 올랐다. 하지만 박철순의 전성기는 4월의 벚꽃만큼 짧았다. 이듬해부터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이미 전조가 있었다. 1982년 24승을 올리는 동안부터 이미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참고 던졌다.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동안에도 그는 허리가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3차전 때 마운드에 올랐다. 코칭스태프가 만류했지만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진통제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다. 박철순은 “돌이켜보면 참 무모했다. 프로 선수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라면서도 “혹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것조차 즐겼던 것 같다. 프로 선수라면 고통 속에 훈련하고, 아픔을 참고 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었고, 이기는 게 좋았다. 만류하는 코칭스태프에게 ‘나갈 수 있습니다. 던질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박철순은 이듬해부터 한 번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보여준 열정과 투혼은 오히려 그에게 ‘불사조’라는 별명을 안겼다. 여러 차례 허리 수술을 받고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속옷 광고를 찍다가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마운드에 설 때마다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철순은 “어찌 보면 한물간 투수가 아닌가. 끝까지 기다려준 구단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가족과 팬들의 넘치는 응원도 받았다”라며 “어떻게 해서든 일어나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간절히 매달렸다”고 했다.
41세이던 1995년. 그는 정규시즌에서 9승(2패)을 올렸다. 원년인 1982년 이후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이었다. 그리고 그해 OB는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우승 확정 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1996년을 끝으로 정들었던 마운드를 떠났다.
그는 야구를 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는 마음에도 병이 왔다. 박철순은 “사업을 접은 후 자격지심이 생겼다. 사람 만나는 걸 피했고,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양지로 꺼내 준 것은 역시 야구였다. 박철순은 몇해 전부터 원로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의 대외협력부회장을 맡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면서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동네 산책길 걷기를 시작으로 작년 가을부터는 피트니스센터에도 다닌다. 박철순은 “일주일에 최소 4번은 운동한다. 피트니스센터에 가 보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정말 열심히 몸 관리를 하더라”며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2025 뉴트리디데이 일구상 시상식’에서는 뜻깊은 이벤트가 열렸다. 이날은 2025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끝판대장’ 오승환(전 삼성)이 일구대상을 수상한 날이었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의 ‘전설’ 박철순과 ‘회장님’ 송진우(전 한화)가 나란히 한 자리에 섰다. 이들 세 명은 등번호 2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나란히 펴들었다. 21번의 시작은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미국에서 돌아온 1982년 21번으로 한국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철순은 “많은 사람들이 22연승을 두고 등 번호를 넘어서려 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원래 내가 원했던 번호는 에이스의 상징인 11번이었다. 그런데 팀 선배가 먼저 11번을 다는 바람에 21번을 달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통산 210승 투수 송진우는 “박철순 선배님을 바라보며 21번을 택했고, 야구에 대한 의미는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오승환 역시 “야구를 너무 잘하셨던 선배님들과 같은 번호를 썼고, 영구결번까지 오게 됐다. 선배님들께 감사한다”고 했다. 이들 세 명이 달았던 21번은 각각 두산, 한화, 삼성의 영구결번이다.

일구회는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 예정인 서울 잠실구장을 기념하기 위해 10월이나 11월경 ‘잠실 고별 레전드 게임’을 추진하고 있다. 일구회는 레전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팬들과 함께 잠실구장의 마지막 순간을 나누고, 선수와 팬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무대를 만들어 보려 한다. 1995년 우승 당시 잠실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박철순도 역사적인 잠실 고별전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박철순은 “지금도 마운드에 서면 마음이 떨린다. 고별전에 서는 선수들과 이를 지켜보시는 팬들 모두에게 엄청나게 감동적인 무대가 될 것”이라며 “잠실구장을 떠나보낼 때 정말 마음이 뭉클할 것 같다. 야구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만큼 레전드 게임을 포함해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철순의 선수 시절 주제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였다. 마이 웨이가 더 잘 어울리는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불사조’ 박철순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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